직장편<3>성희롱을 보는 남녀의 시각차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특히 직급이 올라갈수록 공감비율이 높아 여성 부서장과 임원은 90∼100%가 동의했다. 이에 비해 남성 임원들은 응답자의 절반(53%)만 동의해 눈길을 끈다.
그렇다면 인맥 형성을 위해 주로 어떤 자리가 활용될까? ‘회식 자리와 흡연 장소’(여성 92%, 남성 80%가 동의)였다. 연구원이 인터뷰한 한 여성 임원은 “요즘 남자들은 술은 잘 마시지 않지만 흡연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 담배를 피우며 업무협조를 이끌어낸다. 요즘 네트워킹의 키(key)는 술보다 담배”라고 말하기도 했다.
○ 직급 낮을수록 “성희롱 있다”
올해 중소기업에 입사한 여사원 A(25)는 사내 회식 때마다 바늘방석이다. 주변에서 부장이나 임원 등 상사 옆에 앉으라고 권하기 때문. 거절하면 분위기가 깨질 것 같아 마지못해 앉지만 늘 불편하다. 상사 술잔이 빌 때마다 술을 따라야 할 때도 있다. A는 “자리가 무르익으면 남자 선후배들 입에서 여지없이 음담패설이 나오는데 민망해서 뛰쳐나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렵게 들어온 직장인데 유별나다 소리 들을까봐 참는다”고 했다. 한 중소기업 사장 비서로 근무하던 여사원 B(28)는 사장의 성희롱을 견디다 못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사장이 걸핏하면 “(여자는) 누구 앞에서 속옷을 벗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내 애인 역할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을 한 것.
주지하다시피 성희롱의 기준은 말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의도가 없었을지라도 듣는 사람이 성희롱이라고 느끼면 바로 성희롱이다. 요즘엔 많이 개선되고 있긴 하지만 나이가 많거나 고위직일수록 성희롱에 더 둔감하다는 것이 여성리더십연구원 조사로도 나타났다.
조사에 따르면 “생각보다 빈번한 성희롱이 있느냐”는 문항에 남자는 10%, 여자는 32%가 “예”라고 답해 인식차를 드러냈다. 직급별로도 차이가 심했는데 특히 남자 임원급은 0.7%만 “예”라고 해 거의 전원이 성희롱이 없다고 생각하는 반면 남자 과장급은 15%, 여자 부서장급은 18%, 여자 과장급 이하는 38%나 “예”라고 해 직급이 낮을수록 성희롱이 있다고 느끼는 비율이 높았다.
한편 “회식자리에서 여직원을 높은 사람 옆에 앉으라고 한다”는 문항에 남자는 11%, 여자는 30%가 동의해 이 역시 남녀 간에 인식차를 드러냈다. 또 남자 임원의 경우 이 문항에 4%만 동의했다. 이 문항에 “예”라고 답한 여성들의 경우에는 학력 차이에 따른 인식차가 뚜렷해 눈길을 끌었다. 고졸 이하 여성의 55.9%가 “예”라고 한 반면 전문대졸, 대졸 여직원들은 각각 30.2%, 30.1%로 별 차이가 없었다.
요즘은 회사에서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해 단호하고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라고 하는 데에 대부분 공감한다.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아예 회식자리에 여직원 참석을 꺼리는 문화도 생겼다. 한 대기업 여성 차장은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남자 부장들이 여자들하고 술 먹기 싫다고 말씀하세요. 최근에 동료 남자 부장 한 명이 회식자리에서 여직원 뺨에 뽀뽀를 했다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망신을 크게 당한 일이 있는데 그 뒤부터는 노골적으로 여자들을 경계해요. 물론 각성하는 남자들이 늘어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네트워크나 업무에서 여성들이 소외돼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합니다.”
한 대기업 부장급 남성 직장인은 “예전에는 2차 3차 새벽까지 뿌리를 뽑았는데 요즘에는 ‘회식은 1차로 끝내고, 장소도 사람이 많은 공개적이고 넓은 곳으로 하고, 절대 강제로 술을 주지 않고, 간부사원들은 술이 취했다 싶으면 바로 집으로 간다’라는 내부 규정을 정했다”면서 “조심하는 것은 좋은데 불편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 “회식은 필요하다”
연구원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희롱이 발생할 위험성이 높은데도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술을 마시는 회식이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졌다. “회식은 업무의 연장이므로 필요하다”는 문항에 남성들은 절반을 훌쩍 넘는 69.1%가, 여성들도 절반에 육박하는 48.6%가 “예”라고 응답했기 때문이다. 물론 남녀 간에는 무려 20.5%포인트나 차이가 나 상당한 간극이 있음을 보여주긴 한다.
어떻든 회식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남녀 모두 직급이 높을수록 동의율이 높았다. 하지만 이 역시 직급별로 다소 차이가 나서 남성 임원의 경우 무려 81%가 동의했지만 남성 대리 및 사원의 경우 58%만이 동의했다. 여성의 경우에도 부서장의 경우 무려 76%가 동의했지만 대리 및 사원에서는 41%만이 “예”라고 응답했다.
한편 “회사가 직원들에게 술 잘 마시기를 강요하는 것 같으냐” 문항에는 남성 임원은 11%만이 동의했지만 여성 대리 및 사원은 43%가 “예”라고 답했다. 여성일수록, 직급이 낮을수록 술자리에서 강요받는다고 느낀 적이 많다는 것이다.
여자 공무원 C(31)는 “일 때문에 하는 회식이라면 당연히 참석하지만 부서장이나 선배가 ‘별일 없으면 오늘 저녁이나 하자’는 것까지 업무의 연장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 아니냐”며 “그렇다고 참석하지 않을 경우 ‘여자들은 개인적이다’ ‘조직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뒷말을 들을까봐 마지못해 참석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술과 관련해서는 여자들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연구원이 인터뷰한 남성 관리자들 중에는 “음주를 단순히 커뮤니케이션 도구 정도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능력’이나 ‘정신력’으로 평가해 여성뿐 아니라 잠재적 경쟁자인 다른 남성들을 배제하는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 이용한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요? 술 못 먹는 사람 배려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왜? 그게 본인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하거든. 제일 미치는 게 술 못 먹으면 ‘그래 갖고 조직관리 하겠어?’라고 따지는 거예요. 폭탄주에 못 이겨 쓰러지는 사람한테 ‘정신력이 그래 갖고 임원 되겠느냐’고 하는데 할 말 있습니까. 그 사람들이 기득권을 갖고 있는데. 조직문화는 금방 바뀌기 힘들어요.”(남자 임원)
중견기업에 다니는 남자 D 과장(35)도 “흔히들 회식이 업무의 연장이라고 한다. 실제로 업무 관련성이 얼마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매번 그런 자리에 빠지는 사람과 참석하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E 부장(47)은 “나 역시 솔직히 좋아서 회식을 가는 경우는 별로 없다”며 “하지만 직급이 올라갈수록 빠지거나 자리를 만들지 않을 경우 관리자로서의 능력에 흠집이 날 것 같아 애써 자리도 만들고 참석도 한다”고 했다. 또 다른 회사의 F 부장도 “어느 회사나 줄이 있게 마련이고 자신을 밀어주고 끌어주는 상사나 후배와의 관계도 필요하다”며 “회식이나 술자리가 업무라고는 하지만 영업상 접대를 제외하면 ‘관계’를 만들고 쌓기 위한 면이 더 큰 것 같다”고 말했다.
이진구·구가인 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