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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심층 포커스]아베의 ‘우익 본색’은 어디서 왔을까

입력 | 2013-10-12 03:00:00

A급 전범 외조부 DNA 이어받은 아베 ‘거침없는 역주행’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말한다. “침략의 정의(定義)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정해지지 않았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식민지 침략 같은 객관적 사실을 이렇게 바꿀 수 있는 사람이 현재 일본의 최고 지도자 아베 총리다. 그가 요즘 추진하는 게 집단적 자위권이다. 미국 등 동맹국이 공격받았을 때 일본이 대신 반격하는 권리다. 역대 일본 정부는 이를 헌법에 어긋난다고 봤다. 그렇지만 아베 총리는 이런 해석을 바꾸거나 헌법을 고치려 한다. 한국과 중국 같은 이웃 나라는 그래서 불안하다. 하지만 일본 내부에선 그에 대한 지지도가 치솟고 있다.

지난해 8월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전후 체제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겠다”고 말한 그는 재집권에 성공한 뒤부터 평소 소신을 하나씩 실천에 옮기고 있다. 한국에서 보기에 ‘아찔하기만 한’ 그의 행보를 떠받쳐주는 신념과 철학은 어디서 온 것일까.


어릴 때부터 ‘안보 아베’

1954년 도쿄에서 태어난 그의 초등학교 때 별명은 ‘안보(安保) 아베’였다. 평소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안보 문제 얘기만 나오면 말이 많아졌다. 아베를 관찰한 사람들은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 전 총리의 영향”이라고 말했다.

기시 전 총리는 만주국 관료와 상공장관을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 후 A급 전범으로 징역을 살았다. 이후 복권돼 1957년 총리에 오른 그는 1960년 국민들의 극심한 반발 속에 미일안보조약을 개정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기시 전 총리는 안보 조약 개정 문제로 홍역을 치렀다. 1951년 체결된 미일안보조약에는 미국이 일본을 지킨다는 확실한 조항이 들어 있지 않았다. 기시 총리는 미국에 재협상을 요구했다. 미국은 이를 수용하면서 개정 조약 6조에 ‘극동의 안전’을 위해 미군의 일본 주재를 인정한다는 이른바 ‘극동조항’을 넣었다. 한반도나 대만해협에서 비상사태가 났을 때 미군이 일본 내 기지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당시 야당과 사회주의 진영은 “미국이 전쟁을 시작하면 상대국이 일본을 폭격하게 된다”며 격렬한 안보 투쟁을 벌였다. 총리 관저와 국회가 수십만 명의 시위대에 포위된 가운데 여대생 한 명이 사망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지금 아베 총리는 안보 문제에 관한 한 양보가 없어 보인다. 그는 2004년 발간한 공저 ‘이 나라를 지키는 결의’에서 정치인이 된 이유를 설명했다. 외할아버지의 안보 의식이 정치 인생의 출발점이 됐음이 이 책에서도 드러난다.

“온화한 외할아버지가 나쁜 정치가의 대명사가 된 것에 분함을 느끼면서 자랐고 점차 ‘외할아버지는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게 됐다. 나도 외할아버지처럼 국가를 위해 세상의 틀린 인식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외할아버지 묘소에서 맹세

아베 총리는 어릴 때부터 “네 외할아버지는 보수 반동, A급 전범 용의자 아니냐”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는 1982년 외상이 된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1924∼1991) 의원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하지만 스스로 “아버지보다 외할아버지의 유전자(DNA)를 이어받았다고 생각한다”고 종종 말했다.

외할아버지에 대한 반대 투쟁을 주도했던 사회당 등 진보 세력에 대한 감정적인 반발 역시 다른 각도에서 그의 정치 행보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다. 특히 사회당 등 진보세력이 일본의 군국주의와 천황제, 과거사에 대해 자민당과 대척점에 서온 점은 그의 과거사 인식에서 역주행을 설명하는 하나의 단초가 되고 있다.

일본의 보수 논객인 외교관 출신의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 씨는 한 시사 월간지에 “아베 총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반했다”며 “그는 진짜 보수 정치가다. 역시 기시 씨의 손자라고 생각했다. 정말 국가주의자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기시 전 총리는 생전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반드시 온다”며 두 가지 숙제를 남겼다. 헌법 개정과 북방영토(쿠릴 4개 섬의 일본식 이름)의 ‘회복’이다.

아베 총리는 지난해 총리직에 다시 오른 뒤 외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할아버지는 혼란의 시대에 안보조약을 개정했다. 같은 신념과 결단력으로 부끄럽지 않은 결과를 내겠다”고 맹세했다.

아베 총리는 2006년 내놓은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에서 전후 체제와 헌법 개정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자민당은 진정한 의미의 일본 독립을 이루기 위해 탄생했다. 1951년 연합국과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형식적인 주권은 회복했지만 헌법은 물론이고 교육기본법까지 (연합국) 점령 시대에 만들어졌다. 나라의 골격을 일본 국민 스스로의 손으로 백지부터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진짜 독립할 수 있는 것이다.”

기시 전 총리가 평소 하던 얘기의 판박이처럼 보인다.

그는 또 “당시 미국의 태도가 농후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 헌법 9조의 ‘전쟁 포기’ 조항이다. 미국은 일본이 두 번 다시 구미 중심의 질서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의지로 헌법 초안 작성에 나섰다. 일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전쟁까지 포기시키려 했다”고 주장했다.

전후 체제에 대한 아베 총리의 반발은 A급 전범인 외할아버지에 대한 옹호론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외할아버지에 대한 흠모가 전후 체제에 대한 역주행적 인식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3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태평양전쟁 책임자들을 단죄한 극동국제군사재판에 대해 “연합국 측이 승자의 판단에 따라 단죄했다”고 잘라 말했다.

그가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에 필사적인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는 4월 각료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한국과 중국이 반발하자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각료들에게는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확실한 신념을 보였다.


피해자 의식과 자기 정당화

아베 총리의 세계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요소는 피해자 의식과 자기 정당화다. 그는 평소 “일본은 (패전 후) 60년간 국제 공헌에 노력해오며 호전적인 자세를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국가 간에 문제만 생기면 과거 전쟁에 대한 부채 의식 때문에 꾹 참으며 오로지 폭풍우가 지나가기만 기다리는 자세를 취해 왔다. 그 결과 걸핏하면 우리에게 잘못이 있는 듯한 인상을 세계에 심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공세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의 행보는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 있는 셈이다.

아베 총리가 롤(Role) 모델로 거론하는 인물은 영국의 윈스턴 처칠 전 총리(1874∼1965)와 마거릿 대처 전 총리(1925∼2013)다. 중국의 위협과 관련해 그는 “처칠 총리는 군비 강화가 나치의 대두를 억누를 수 있다고 일찌감치 주장했으나 무시당했다. 국민들이 네빌 체임벌린 내각의 ‘유화정책’이 결과적으로 나치의 침략을 초래한 사실을 깨닫고 난 뒤에야 처칠은 총리에 올랐다”고 말한다. 결국 일본의 군사대국화가 선제적으로 중국의 도발을 억누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일본 진보 진영에서 군국주의 회귀라고 비판하는 2007년 교육기본법 개정과 관련해서는 대처 총리를 방패막이로 자주 거론했다.

“대처 총리는 영국병을 고치기 위해 젊은이의 의식개혁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1988년 ‘교육개혁법’을 제정했다. 인종차별과 노예 착취 등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자학적 사관을 교과서에 담고 있어 이대로는 영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키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따라 식민지 노예 노동의 어두운 면과 함께 영국이 앞장서 노예무역을 폐지했다는 사실도 적시하도록 했다.”

대처 전 총리의 사례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아전인수식 주장이지만 아베 총리의 이런 논리는 일본 국민들에게는 먹혀들고 있다.


전략적 현실주의자의 면모

아베 총리의 정치 신념은 ‘싸우는 정치가’다. 외할아버지처럼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라면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주의자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아베 총리가 전후 체제와 관련해 미국에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미일동맹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주의자의 한 단면이다. 아베 총리는 외할아버지가 미일안보조약을 개정해 포함시킨 미국의 일본 방위 조항이 유사시 실제로 가동할지에 대해 상시적인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추진하는 집단적 자위권은 중-일 분쟁에 말려드는 것을 피하려는 미국을 동여매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일본의 한 유력지 기자는 “아베 총리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우익적인 면모를 강화하는 전략을 써왔고 우익들은 아베 총리를 자신들의 심벌로 여겨온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는 원리주의자라기보다는 현실주의자”라고 분석했다. 헌법 개정과 집단적 자위권 확보에 대한 공명당과 국민들의 반발이 커지자 이에 대한 논의를 내년으로 미루는 여유를 보이고 있는 것도 그 증거라는 것.

2006년 1차 내각 때 교육기본법 개정, 개헌 절차를 규정한 국민투표법 통과 등 우경화 행보를 강하게 밀어붙이다가 지지율 급락으로 낙마한 경험도 현실주의에 머물게 한다는 평가다.


아베 가문에 한국의 피가 흐른다?

‘인간 아베’는 상당히 매력이 있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중평이다. 교분을 나누는 친구가 많고, 술은 많이 마시지 못하지만 모임에는 꼭 참석한다는 것이다. 선배들에 대한 예의도 깍듯하다는 평가가 많다. 2007년 5월 아베 총리의 의회 입성 동기인 마쓰오카 도시카쓰(松岡利勝) 농수상이 정치자금 문제로 자살하자 측근들 앞에서 연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귀공자로 자랐지만 서민적인 모습도 보인다. 총리가 되기 전까지는 매일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직접 사들고 집으로 갔다. 선거 유세로 전국을 누빌 때도 역이나 공항 매점에 직접 들러 캐러멜이나 초콜릿으로 군것질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일각에서는 그에게 한국계 피가 섞여 있다는 주장도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인 심수관 선생의 14대 후손은 2006년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시 전 총리의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1901∼1975) 전 총리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나를 찾아와 사토 집안도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계라고 고백했다”고 증언했다.

같은 해 시사주간지인 슈칸아사히(週刊朝日) 10월 10일호는 아베 총리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 전 외상이 생전에 가정부에게 “나는 발해에서 기원한 조선인이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 가정부는 아베 가문에서 40여 년을 지낸 것으로 전해졌다.

진위는 확인할 수 없지만 아베 총리는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한국인들의 감정을 자극하면서도 한국 예찬론을 펼치고 있다.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에서 그는 “일본은 오랜 기간 한국으로부터 문화를 흡수해 온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류 붐은 결코 일시적인 현상은 아니다. 나는 한일 관계를 낙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수 원리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두 얼굴을 가진 아베 총리. 외할아버지와 관계에서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으로 보이는 그의 생각이 앞으로 어떤 파란을 몰고 올지 주목된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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