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형(1966∼)
이마 흰 사내가 신발을 털고 들어서듯
눈발이 마루까지 들이치는
어슴푸른 저녁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마루에 나앉아
밤 깊도록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설탕을 타 마신 막걸리는 달콤 씁쓰레한 것이
아주 깊은 슬픔의 맛이었습니다
자꾸자꾸 손목에 내려 앉아
마음을 어지럽히는 흰 눈막걸리에 취해
이제사 찾아온 이제껏 기다려 온
먼 옛날의 연인을 바라보듯이
어머니는 젖은 눈으로
흰 눈, 흰 눈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초저녁 아버지 제사상을 물린 끝에
맞이한 열다섯 겨울
첫눈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며
나는 다가올 첫사랑을 기다리며
첫눈 내리는 날이면
댓잎처럼 푸들거리는 눈발 속에서
늘 눈막걸리 냄새가 납니다
어머니가 사연이 많으신가 보다. 왜 아니실까. 딸이 열다섯이면 엄마 나이는 마흔 안팎. ‘이마 흰 사내’였던 남편을 아주 젊은 나이에 보내고 홀로 어린 딸을 키우며 살아왔는데…. 오늘은 제삿날, 화자의 아버지가 세상을 뜨던 날도 이렇게 첫눈이 내렸을지 모른다. 죽어가는 이의 눈에 담긴 풍경은 유리창 밖 허공에서 ‘댓잎처럼 푸들거리는 눈발’이었을지 모른다. 죽어서도 그리울, 젊은 아내와 어린 딸을 두고 온 첫눈 내리는 날.
인생은 변한다. 달콤했다가 씁쓸했다가. 이게 좋은 것이다. 십 년 내내 달콤하면 문제 아닐까? 십 년 내내 씁쓸하면 더 문제지만.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