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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최영해]선비와 벼슬아치

입력 | 2013-10-15 03:00:00


최영해 논설위원

박근혜 후보의 대선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으로 대통령직인수위원을 지낸 홍기택 산업은행장은 올 3월까지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였다. 2001년부터 9년 동안 동양증권 사외이사를 맡아 동양그룹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동양 사태의 핵심인 동양시멘트의 주채권은행이 산업은행이다. 그런데도 동양시멘트는 산업은행에 미리 알리지 않고 법정관리를 택했다. 현재현 회장이 경영권을 보호받기 위해 법정으로 달려갔으나 주채권은행이 낌새도 채지 못했다니 그동안 돈을 대준 은행이 뒤통수를 맞은 꼴이다.

동양시멘트를 담보로 한 동양 기업어음(CP) 투자자의 피해를 줄이려 했다면 먼저 채권단 자율협약에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자율협약은 워크아웃 전 단계로 일시적 유동성 위기에 빠진 기업과 구조조정에 대한 포괄적협의를 맺고 경영정상화를 지원하는 것이다. 현 회장은 자율협약을 맺었던 강덕수 STX 회장이 경영권을 박탈당하는 것을 보고 법정관리 쪽을 택한 것 같다.

정책금융을 지원하는 산업은행이 팔짱만 끼고 있는 것처럼 비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홍 행장 자리에 관료 출신이 있었다면 동양 사태가 이처럼 확산됐을까. 역대 산업은행장은 대부분 경제관료가 맡았다. 자율협약을 맺으려면 홍 행장이 주도적 역할을 했어야 했다. 경제관료 출신의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대통령 사람’인 홍 행장을 버거워한다는 뒷담화도 들린다. 책임질 일은 하지 않으려는 ‘변양호 신드롬’까지 겹쳐 시장의 급한 불을 끄는 소방수가 사라지는 바람에 재앙이 커진 건 아닌지 모르겠다.

똑똑한 기획재정부 공무원들이 상반기 내내 만든 세제개편안을 대통령 한마디에 하루 만에 뚝딱 새것으로 바꿔오는 현오석 경제부총리를 ‘영혼이 있는 관료’라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양한 컨틴전시 플랜(비상대책)을 지닌 관료 체질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책임있는 자세라고 보기 어렵다.

평생을 외교관으로 살아온 박준우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 정무수석이라면 의원들이 자주 가는 단골식당과 주인까지 꿰뚫고 있어야 한다. 국회를 오래 출입한 정치부 기자와도 흉금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여의도 정치’에 익숙한 사람이 제격이다. 외교안보수석이라면 한미동맹 강화를 우선 가치로 하고 국방부 장관과 대통령국가안보실장, 국가정보원장과도 호흡을 맞춰야 한다. 주프랑스 대사를 3년여 지낸 주철기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유럽과 중남미에서 근무한 경력이 대부분이다. 미국을 떼놓고 어떻게 외교와 안보를 논하겠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아무리 좋은 벼슬이라도 몸에 맞지 않는 것을 덥석 받는다면 국민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고관대작(高官大爵)은 족보에 남을 가문의 영광이지만 자기 것이 아닌 자리는 불편하다. 대통령이 삼고초려해도 내 감투가 아니라면 고사하는 것이 참 공복(公僕)의 자세다. “내 자리가 아니다”며 물리치는 선비는 없고, 자리만 탐하는 ‘벼슬아치’가 설치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니다.

지난해 3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김용 다트머스대 총장의 손을 잡고 백악관 정원인 로즈가든에 섰다. 오바마는 “김 총장은 에이즈(AIDS)와 결핵 퇴치 활동에서 뛰어난 역량과 경험을 보여줬다. 다양한 경력을 갖춰 세계은행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가장 적합한 인물로 판단했다”며 아시아계 최초의 세계은행 총재 발탁 사실을 알렸다. 국민에게 예를 갖추는 대통령의 이런 모습을 청와대 녹지원에서도 봤으면 좋겠다.

최영해 논설위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