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언이 돈 챙겼다고?”… 첩보의 출처는 박영준이었다
2009년 2월 청와대 국무회의장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오른쪽)과 김백준 대통령실 총무비서관. 박영준이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고, 김백준은 말없이 듣고만 있다. 7개월여 전 정두언의 ‘권력 사유화’ 공세로 청와대를 떠나야했던 박영준. ‘MB의 집사’를 붙들고 무슨 하소연이라도 하는 모습이다. 동아일보DB
민주당 강성종 의원 체포동의안이 가결되던 2010년 9월 3일 국회 본회의장. 서울지검장 출신의 한나라당 이범관 의원은 작심한 듯 독한 말을 퍼부었다. 정두언, 남경필 의원한테 내뱉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화랑은 정두언의 부인을, 주얼리(보석상)는 남경필의 부인을 지칭하는 게 분명했다.
이범관은 남경필 바로 앞자리였다. 남경필은 분을 삭이며 자리를 떴다. 학교로 따지면 이범관은 남경필의 연세대 대선배였다.
사실 사찰이라는 게 당하는 사람은 피가 말라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남의 말’처럼 하기 십상이라….
‘정두언 그룹’이 사찰을 감지한 건 2008년 4월 말에서 5월 초 사이. 정태근의 기억은 이렇다. “검사 출신으로 대통령민정수석실에 있던 장용석 비서관으로부터 시그널이 왔습니다. 대충 ‘정두언 의원의 부인이 화랑을 경영하면서 그림을 비싸게 팔고 있고, 정 의원이 자기 지역구에 있던 옛 미미예식장 터 재개발에 관여해 5000만 원을 받았다’는 첩보가 기획조정비서관실을 통해 들어왔다는 겁니다.”
기획조정비서관은 ‘SD의 남자’로 불린 박영준이었다. ‘정두언 그룹’은 기획조정비서관실에 이창화라는 국정원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박영준의 기획조정비서관실은 기업으로 치면 기획조정실의 역할을 했다. 나중엔 기획조정실장이라는 직제가 생기지만 MB 취임 초기엔 기획조정비서관이 정보와 인사를 관리했다. 노무현 청와대 때의 국정상황실 기능도 함께 맡았다. 그런 기획조정비서관실에 국정원 직원이 파견 근무를 하고 있는 것 자체는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박영준의 기획조정비서관실’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6월 6일, 촛불 시위의 와중에 정태근은 MB를 만났다. 정태근은 MB가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정무부시장을 했고, 대선 때는 후보수행단장을 지낸 이를테면 ‘친이(親李) 직계’였다.(MB 서울시장 시절 정무부시장은 정두언-이춘식 전 의원-정태근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MB를 만나고 나오는데 정두언으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내일 기사가 나온다.”
조선일보의 정두언 인터뷰 얘기였다. SD와 박영준이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정두언의 직격탄이 그대로 실린 인터뷰였는데, 결국 활자화를 막지 못했다는 소식이었다. 상황이 꼬여 가고 있었다. ‘이제 막 MB를 만나 류우익, 박영준, 장다사로의 정리를 주장하고 나왔는데 내일 아침 인터뷰 기사까지 터져 나오면….’
MB나 SD는 정두언과 정태근이 서로 짜고 ‘협공’을 한 것으로 받아들일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그건 권력투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MB가 “사실에 근거하지도 않은 이야기나 하고…”라며 역정을 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도리가 없었다.
SD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SD는 일본으로 잠시 몸을 피하기 전에 ‘정두언 그룹’과의 문제를 정리하고 싶었다.
정태근=“부의장님은 몰라도 류우익, 박영준, 장다사로는 정리해야 합니다.”
SD=“류우익, 박영준은 정리하겠다. 그런데 꼭 장 비서관까지 해야겠느냐? 그 대신 너희들과 가까운 박형준을 쓰겠다.”
정태근=“그렇다면 더이상 (사찰) 문제를 확대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도 정태근은 속으로 놀랐다. 박영준이 MB나 SD가 정두언을 의심하고 있다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장난’을 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SD가 이렇게까지 ‘만사형통(萬事兄通)’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었다. 인사권자인 대통령을 제치고 거리낌 없이 박형준을 청와대 비서관으로 데려다 쓰겠다고 하지 않는가.
MB는 7월 7일 청와대 수석 진용을 전면 개편했다. 물론 ‘촛불 사태’의 수습책이었다. 국정지지율은 취임 초 50%대 중반에서 20%대 초반으로까지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엔 ‘정두언 그룹의 쿠데타’를 진정시키려는 뜻도 있었다. 박영준은 이미 한 달 전인 6월 6일 사표를 냈다. 그 대신 17대 의원을 지내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획조정분과위원으로 참여했던 박형준이 대통령실 홍보기획관(차관급)으로 들어왔다. SD가 말한 그대로였다.
그래도 찜찜한 게 있었다. 국정원 직원 이창화였다. 박영준은 나갔지만, 이창화는 청와대에 그대로 있었다.
SD, 정두언, 정태근, 그리고 이춘식의 서울 메리어트호텔 4자 회동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정두언은 포항 출신인 이춘식을 SD의 대리인이자 일종의 ‘증인’ 자격으로 참석시키길 원했다. 그런데 회동의 배경에 대해서는 정태근과 이춘식의 기억이 정반대로 다르다.
정두언과 정태근은 이춘식의 제안으로 메리어트 회동이 이뤄졌다고 했지만 이춘식은 “내가 제의한 게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춘식의 증언. “정두언이 사찰을 당하고 있는 줄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영감(SD)도 잘 몰랐다. 자기가 괴로우니까 나한테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해서 내가 영감에게 연락을 했을 뿐이다. 원래는 영감, 정두언, 나 이렇게 셋이서 만나려고 했는데 정두언이 정태근을 데리고 나왔더라.”
정두언은 이창화 문제를 직접 따졌다.
정두언=“다른 건 몰라도 청와대가 사찰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박영준은 나갔지만) 이창화를 청와대에 그대로 두고 (사찰 문제로 불거진 갈등을) 어떻게 풀겠습니까?”
SD=“나는 정말 모르는 일이다.”
정두언=“이창화도 지시를 받아서 한 일이니까 자르지는 말고 국정원으로 다시 돌려보내십시오.”
메리어트 회동으로 사찰을 둘러싼 ‘SD 그룹’과 ‘정두언 그룹’의 갈등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또 다른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성호 국정원장이 “그런 놈은 받을 수 없다. 잘라야 한다”고 발끈한 것이다. 김성호는 노무현 정부 때 법무장관을 지내고도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장으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정권교체가 이뤄졌는데도 이전 정부의 법무장관 출신을 권력기관장 중의 권력기관장인 국정원장에 기용한 건 아직도 미스터리다.
이창화는 그런 김성호도 감시했다. 김성호가 MB 정부의 국정원장이 되고 난 이후에도 ‘친노 인사’를 특보로 쓰고 있다든가, 서울 청담동의 유명한 바(bar)인 ‘티볼리’에서 이종찬 민정수석비서관과 만나 ‘모종의 협의’를 하는 장면이 목격됐다는 사찰보고가 올라갔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난처해진 건 류우익의 후임인 정정길 대통령실장과 청와대 직원의 인사를 책임지고 있는 ‘MB의 집사’ 김백준 총무비서관이었다. 정태근의 증언. “(SD의 대리인이자 메리어트 회동의 증인인) 이춘식 의원은 분명히 ‘김백준에게 (이창화 문제 처리에 관한 SD의 생각을) 전했다’고 했는데, 김백준이 SD에게 확인해 보니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겁니다.” SD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 정두언은 “국회 의원회관 이상득 의원 방에서 농성을 하겠다”고 거듭 압박했고, 김성호는 김성호대로 이창화에 대한 노여움을 풀지 않았다.
정정길은 결국 이창화를 국무총리 공직윤리지원관실로 보냈다. 이창화는 김성호가 물러나고 원세훈 국정원장이 취임(2009년 2월)한 직후 친정인 국정원으로 복귀했다. 사찰을 둘러싼 ‘SD 그룹’과 ‘정두언 그룹’의 전선(戰線)은 그렇게 소강국면을 맞는 듯했으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사찰의 불씨는 점점 권력투쟁의 장작 더미로 번져가고 있었다.<‘사찰의 추억’은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김창혁 선임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