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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정미경]세계 최고 민주주의 맞나?

입력 | 2013-10-21 03:00:00


정미경 워싱턴 특파원

기자가 사는 미국 워싱턴 인근 아파트에는 연방정부 공무원들이 많이 산다. 아파트는 최근 두 주일 동안 여기저기서 뚝딱거리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관리사무소에 물어보니 연방정부 잠정폐쇄(셧다운)로 직장에서 일시 해고된 입주자들이 모처럼 집수리에 나섰기 때문이라고 했다.

얼마 전 아파트에서 열린 ‘셧다운족(族) 위로 파티’에 가봤다. 겉으로는 “모처럼 쉬게 돼서 즐겁다”며 건배를 하지만 폐쇄 사태가 얼마나 갈지 몰라 다들 불안해했다. 불확실한 미래와 끝없이 이어지는 정쟁(政爭)에 대한 자조도 섞여 있었다. 이날 모인 미국인들에게서 느낀 것은 ‘불만’과 ‘당혹’이었다.

셧다운과 국가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 해결로 미국인들의 불만은 일단 가셨겠지만 최고의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미국의 정치 시스템이 이런 모습을 보인 데 대한 창피함은 오래갈 듯하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정부 운영의 기본적인 합의에도 이르지 못해 세계의 걱정거리가 된 것에 대해 미국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미국의 위상 추락을 재촉하는 자폭 행위에 비유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디폴트와 셧다운이 미국의 위상 추락은 물론이고 세계 경제의 혼란을 유발하는 중대 사태임에도 다른 나라들로부터 비판의 목소리는 거의 들려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제통화기금(IMF) 및 다른 나라의 공식 반응은 “미국은 이번 사태를 잘 해결하리라 믿는다”는 미지근한 충고가 전부였다. 미국은 그동안 세계 경제위기 해결사 역할을 자임해 왔다. 위기를 겪는 나라에 IMF를 통해서 또는 직접 나서서 극약 처방을 제시했다. 외환위기 당시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은 최근 유럽의 금융위기 해결에 3년 넘게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리스의 경우에서 보듯이 지도자 교체 압력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이 정작 위기의 주인공이 됐을 때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주체가 없다.

미국 정치권이 디폴트와 셧다운에 대한 다른 나라들의 비판에 얼마나 귀를 기울일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국가안보국(NSA)의 무차별 정보 수집 탓에 그러잖아도 국제사회의 눈길이 곱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은 다른 나라의 우려를 과소평가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번 사태는 우선적으로 미 정치권이 풀어야 하는 문제이지만 정치권이 극한 대립을 거듭하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 않을 때 국제사회의 따끔한 충고가 사태 해결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외부 압력의 부재가 미국 정치권으로 하여금 더 정쟁을 장기화하고 책임 떠넘기기에 몰두하게 만들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물론 미국의 이번 사태는 경제적 원인이 아니라 정치권 갈등에서 촉발됐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가 충고할 소지는 크지 않다. 자칫 ‘내정 간섭’으로 비칠 위험도 있다. 그러나 재정 문제를 놓고 주기적으로 벼랑 끝 대치를 일삼으며 세계경제에 위기감을 조장하는 미국에 대해 국제사회가 침묵을 지키는 것은 ‘직무 유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미국은 결국 옳은 길을 간다. 비록 틀린 길을 모두 가본 후에야 옳은 길을 찾아가지만 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결코 조용한 여정(旅程)이 아니라 반대 의견을 모두 포용하는 시끄러운 과정을 거쳐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 정치 시스템이 보여주는 혼란상은 민주주의를 위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절차라기보다 국가적 에너지의 소모전에 불과할 뿐이다. 미국에는 진정하고 따끔한 충고를 해주는 나라가 필요하다. 미국은 진심 어린 충고는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나라다.

정미경 워싱턴 특파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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