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팔(1937∼)
사면이 유리(琉璃)의 벽(壁) 같은
깊은 고요 속
낮은 산자락에
푸른 대문이 있는
그 집
빨랫줄엔
빨래가 다 마르고
바지랑대 높이
구름 그림자 지나가니
하늘은
그대로 환한 거울 속인데
창이란 창을 다 열어 놓고
온종일
사람이 그립습니다.
그 어떤 우리 한국의 전형적인 가을 그림이 있다. 단풍 든 불국사,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 노란 호박이 익어가는 산골짝의 초가집…. 초등학생 책받침이나 사계절 풍경이 담긴 옛날 달력에서 볼 수 있었던 고향 풍경 같은 사진이나 그림들. 달력에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영혼이 그 시대 상황에 맞게 원형적 이미지로 담겨 있다.
집을 집이게 하는 게 뭘까. 지붕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매우 실용적 사고방식을 가진 거다. 대개의 예술가는 집을 집이게 하는 게 창이라고 생각하리라. 창이 없는 건물은 창고와 다름없다고. 바깥과 안의 경계를 없애주는 창! 이십여 년 전 사주와 관상을 잘 본다는 이가 내 맞은편에 앉았던 술자리가 있었다. 그를 초대한 친구가 내 관상을 봐주라 부탁하자 그는 흘깃 나를 보더니 심드렁히 단 한마디를 했다. “저 사람은 죽은 사람이네요.” 그게 무슨 뜻인지 간간 궁금했는데 내가 삶이 닫혀 있는, 창 없는 사람이란 뜻이었나 보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