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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말하다

입력 | 2013-10-22 03:00:00

‘Tell Me Her Story’전 & 윤석남전




코리아나미술관의 ‘텔 미 허 스토리’전에서 선보인 아르헨티나 작가 니콜라 코스탄티노의 ‘트레일러’. 작가가 자신과 닮은 인형을 만든 뒤 임신과 출산 과정을 마치고 분신을 스스로 파괴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다. 이번 전시는 국내외 작가 15명의 작품을 통해 여성주의 미술의 흐름을 돌아보는 자리다.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출근한 후 남편 신발은 항상 집 안쪽을 향해 놓는다’ ‘출근길에 여자가 앞을 가로지르면 그날은 입갱을 않는다’…. 강원도 광산에서 석탄을 캐던 광부들의 평소 어록이다. 사소한 말에 여성에 대한 시각이 담겨 있음을 포착한 홍영인 작가는 이 말을 천에 수놓아 작품을 만들었다.

전망 좋은 사무실에 당당한 비즈니스 우먼과 여자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각기 오슬로와 런던에서 여성 기업인을 모델로 촬영한 노르웨이 출신 안네 카트리네 돌벤의 2채널 영상이다. 성모자(聖母子)상을 차용해 사회적으로 고착화된 남녀의 역할에도 권력 관계가 작동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개관 10주년을 맞아 서울 신사동 코리아나미술관에서 기획한 ‘텔 미 허 스토리(Tell Me Her Story)’전에 나온 작품들이다. 국내외 작가 15명의 영상 사진 설치작품으로 여성주의 미술의 흐름과 현주소를 돌아본 국제기획전이다. 화장박물관으로 전시를 연계한 것도 흥미롭다. 12월 14일까지. 2000∼3000원. 02-547-9177

억압받는 인간에 대하여

‘텔 미 허 스토리’전에선 자전적 서사, 신화와 역사가 얽힌 영상작품으로 풍성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대부분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모든 인간을 억압하는 보편적 문제로 대입할 만한 이야기도 여럿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세르비아 출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추억과 향수가 공존하는 할머니의 부엌과 고아들을 먹여 살렸다는 성 테레사를 연계해 공중부양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한국서 태어나 덴마크로 입양된 제인 진 카이센은 일본군 위안부, 기지촌 여성, 해외 입양아의 계보와 삶을 추적한 영상을 완성했다.

이란 출신 시린 네샤트의 ‘남자 없는 여자들’에는 1953년 이란 쿠데타를 배경으로 네 여성이 등장한다. 2009년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감각적 영상미를 자랑한다. 이에 비해 아르헨티나 출신 미카 로텐버그의 ‘스퀴즈’에선 낯설고 기괴한 영상이 눈길을 끈다. 주변부로 밀려나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아시아 여성의 노동문제를 다큐적 접근 대신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듯 시각문화적 퍼포먼스로 펼쳐냈다.

자신과 닮은 인형을 만들고 그 분신을 파괴하는 과정을 그린 니콜라 코스탄티노(아르헨티나)의 ‘트레일러’, 부유한 중년여성들이 미와 행복에 대해 말하는 율리카 루델리우스(독일)의 ‘포에버’, 패션을 테마로 폭력의 문제를 제기한 나탈리에 유르베리(스웨덴)의 점토애니메이션은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깊이 있게 파헤친다.

억압받는 자연에 대하여

윤석남의 ‘우연이 아닙니다 필연입니다’. 학고재 갤러리 제공

한국 여성주의 미술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 윤석남(74)의 개인전도 때마침 서울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 제목인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는 자기들 편의대로 세상만물을 명명하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담고 있다. 11월 24일까지. 02-720-1524

전시장엔 강원도 산골 화전민 집에서 오랜 비바람을 견딘 너와에 여인의 얼굴을 간결한 선으로 그린 40여 점, 곤충과 식물을 한지로 오려내고 초록 구슬을 바닥에 깔아놓은 설치작품 ‘그린 룸’이 등장해 숲의 향기를 은은하게 발산한다. 특히 너와 그림은 폐기처분될 운명의 나무판이 작가 손끝에서 새 생명을 얻고 예술로 태어난 점에서 울림이 깊다. 군데군데 마모된 부분과 옹이를 오롯이 살려 완성한 작업은 이름 없는 여인들과 상처받은 자연을 달래는 듯 치유의 의미로 다가온다.

고미석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