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속에 성장한 재일동포… 문화 소외된 지방 미술관 골라 50년 수집한 1만 점 기부 정부의 문화 지원 늘었지만 문화 아끼는 국민 더 많아져야 ‘문화 선진국’ 이뤄진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1980년 일본의 한 미술잡지에서 화가 이우환 씨를 다룬 특집 기사를 발견했다. 뛰어난 화가임을 직감했다. 잡지 500권을 구입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널리 알리고 싶어서였다. 이 씨와는 4년 뒤인 1984년 처음 대면했다. 유럽 전시회를 앞두고 있던 이 씨가 지원을 요청해 왔다. 700만 엔을 후원했다. 이 씨의 작품 41점을 수집했다. 30년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씨는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주말 서울역 문화관에서 열린 ‘문화의 달’ 기념식에서 이 씨는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수상 소식을 듣고 그는 행복감에 젖었다.
그가 모국을 처음 찾은 것은 1973년이었다. 고향이 전남 영암인 아버지를 모시고 방문했다. 이때부터 한국 화가의 작품 수집에 나섰다. 1993년 갓 개관한 광주시립미술관을 찾았을 때 그는 텅 빈 전시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건물은 잘 지어 놓았으나 내부를 채울 미술품이 없었다. 이 미술관에 수집품을 기증하는 것이 숙명처럼 여겨졌다. 지난해까지 2300점을 보냈다.
이 스토리의 주인공 하정웅 씨(74)는 우리 문화계에서 돋보이는 존재다. 한 개인이 1만 점 이상 기증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기증 방식도 눈길을 끌 만하다. 하 씨는 수집품을 주로 지방의 공공 미술관에 보냈다. 소외된 곳에 문화의 싹을 틔우고 싶었다.
하 씨의 메세나(문화예술 후원) 활동은 우리의 국가적 목표인 ‘문화 선진국’ 진입을 위해 큰 의미가 있다. 최근 문화예술을 둘러싼 환경은 부쩍 개선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문화가 있는 삶’을 내세우며 ‘문화 재정 2%’를 약속했다. 정부 예산 가운데 문화 관련 예산을 전체의 2%까지 늘리겠다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예산만 해도 올해 4조1000억 원에서 내년에는 4조3300억 원으로 5.7% 늘어난다. 박근혜 정부 임기 마지막 해인 2017년에는 문화 재정이 연간 7조8000억 원에 이르러 2% 공약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국가 주도의 ‘문화예술 키우기’는 부작용도 피할 수 없다.
정부 지원금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예술 창작이 왜곡될 여지가 있다. 공산주의 국가들만큼 예술가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나라도 없다. 그러나 이 국가들의 창작품은 유치한 체제 선전물에 머물렀다. 미국이 문화예술 지원에서 민간 차원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산 낭비의 가능성도 높다. 요즘 지방자치단체들이 지역축제 등에 막대한 돈을 쓰지만 과시성이나 소모성이지, 그다지 문화 발전으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정부의 문화 지원도 이런 식이라면 외화내빈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하 씨처럼 문화예술에 열정을 지닌 국민이 늘어나야 문화예술의 토양이 풍요로워지고 문화 선진국이 가까워진다. 그러나 기부문화를 분석한 국내 조사에서 전체 개인기부자 가운데 문화예술 분야에 기부했다는 사람은 0.2%에 불과했다. 우리의 문화예술 후원은 아직 척박하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