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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Report]마포종점 그 불빛… 서울을 밝힌 83년

입력 | 2013-10-24 03:00:00


1950년 전쟁 직전 마포나루에서 바라본 서울화력발전소 [1]의 모습. 1953년 이승만 대통령[2]과 1970년 박정희 대통령[3]이 시찰에 나설 정도로 이 발전소는 서울 전기 공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 매연이 없는 천연가스로 전기를 생산하는 이 발전소[4]는 3년 뒤 지하로 들어가고 발전소 터는 공원으로 바뀐다.

밤새 청춘을 토해낸 젊은이들의 열기가 가라앉은 이른 아침의 서울 홍익대 앞.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상점들을 지나 마포 강변에 다다르자 한강 너머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높게 솟은 아파트와 빌딩 숲 사이를 촘촘히 메운 카페를 등지고 강변을 따라 난 골목길에 접어들자 높게 솟은 가로수 사이로 차가운 기계음이 아침의 적막을 깨운다.

“위이잉, 쿵.”

하얀 담장 너머 연기를 내뿜는 굴뚝 앞에 자리 잡은 굴착기가 굉음을 내며 움직일 때마다 붉은 흙더미가 쏟아져 나온다. 굴착기 옆으로는 시간의 때가 켜켜이 쌓인 낡은 건물들의 철거 공사가 한창이다.

오랜만에 이곳을 찾은 도규현 씨(72)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굴착기가 파놓은 구덩이 옆을 빠르게 지나치다 버려진 붉은 벽돌 건물 앞에 서 있는 비석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광혜시원(光惠始源·빛의 축복이 시작된 곳).’

1995년 도 씨가 동료들과 성금을 모아 세운 비석이다. 비석이 서 있는 자리는 당인리발전소(현 서울화력발전소)가 자리했던 곳. 한국 최초의 화력발전소인 서울화력발전소는 이제 지하화 공사가 마무리되는 3년 뒤 지상에서 모습을 감춘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 이 자리에 들어선 지 86년 만이다.

○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은 최초의 화력발전소

1970년 한국전력에 입사한 도 씨는 직원들 사이에서 행운아로 불렸다. 입사 후 퇴직할 때까지 26년간 서울화력발전소에서만 일했기 때문이다. 외진 곳에 있는 다른 발전소와 달리 서울 한복판에 있는 서울화력발전소는 ‘꿈의 직장’으로 꼽혔다. 이곳에서 일하려던 직원들 간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적어도 장관 ‘빽’은 있어야 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발전소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금기를 깨고 서울화력발전소가 마포 인근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근처에 있던 마포 전차 종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제강점 후 전국의 전력산업을 손에 넣은 조선총독부는 당시 대부분의 발전소를 중국과 가까운 한반도 북부지방에 지었다. 대륙 침략을 위한 전초기지로 세운 공업단지에 전기를 공급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포를 중심으로 서울 주변 지역을 연결하는 전차 노선이 확대되면서 전력수요가 크게 늘어나자 서울을 비롯한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전력난이 심각해졌다. 전기요금과 전차요금이 치솟자 각 지역에서는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조선총독부는 결국 1929년 세종로∼서대문∼마포를 잇던 전차의 종착역 근처에 발전소를 세우도록 했다.

당초 전차에 전기를 공급할 요량으로 세워진 소규모 발전소였던 서울화력발전소는 광복 직후 몸값이 치솟았다. 1948년 남한이 소비하던 전기의 90%가량을 공급하던 북한이 일방적으로 단전 조치에 나섰기 때문이다.

서울화력발전소는 하루아침에 수도권에 전기를 공급하는 최후의 보루로 떠올랐다. 이승만 정부는 북한으로부터 석탄 공급까지 끊어지자 서울화력발전소에 일본에서 긴급 공수한 석탄을 쏟아 부으며 발전기를 돌려야 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서울화력발전소는 남과 북 모두에 최우선 점령지로 꼽히는 요충지가 됐다. 점령군이 바뀔 때마다 파괴와 복구가 반복됐다. 1951년 중공군으로부터 되찾은 이 발전소는 정부 각 기관에 전기를 공급하는 유일한 발전소가 됐다.

○ 경제성장기와 함께 맞은 전성기

22일 서울화력발전소를 찾은 퇴직 운전원 도규현 씨가 철거 공사가 한창인 발전소 본관 앞 비석을 쓰다듬고 있다. 비석에 쓰인 ‘광혜시원’은 ‘빛의 축복이 시작된 곳’이라는 뜻으로 한국 최초의 화력발전소가 들어섰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본격적인 경제성장기에 접어든 1970년대 들어 서울화력발전소는 전성기를 맞았다. 1962년 수립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농업생산력 증대에 이어 두 번째 목표로 전력 등 에너지 공급 확충을 꼽은 박정희 정부는 서울화력발전소 증설을 추진했다. 정부는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수차례 미국과 일본으로 보내 설득을 거듭한 끝에 서울화력발전소 확대에 들어갈 4600만 달러 규모의 차관을 받아왔다.

서울화력발전소 증설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착공식에 참석할 정도로 국가적 관심사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전은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발전설비 수송작전을 펼쳤다.

1968년 진행된 ‘발전기 한강 도하작전’이 대표적 사례다. 일본 미쓰비시사가 제작한 이 발전기의 무게는 200t이 넘어 당시 ‘단군 이래 최대 화물’로 불렸다. 문제는 이 무거운 발전기를 싣고 어떻게 한강을 건너느냐는 것. 수많은 전문가를 동원해 역학분석을 마친 정부와 한전은 빈 드럼통 2400개를 연결한 임시 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건너기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발전기가 한강에 도착할 때쯤 갑자기 장마가 닥쳐 드럼통 다리를 연결하려던 계획은 시도도 하기 전에 틀어졌다. 공사 지연을 우려한 한전은 발전기를 싣고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를 건너기로 했지만 이번에는 서울시가 “다리가 무너지면 누가 책임질 것이냐”며 완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당초 열흘로 예정됐던 발전기 한강 도하작전이 두 달 가까이 지연되자 급해진 한전은 서울시에 “다리 훼손 시 한전이 모든 책임을 진다”고 약속을 한 뒤에야 세 시간에 걸친 거북이걸음 끝에 겨우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증설공사를 마친 서울화력발전소의 전기 생산 용량은 약 41만 kW로 공사 전의 10배 수준으로 늘었다. 이에 따라 1971년에는 서울 전체 전기소비량의 75%를 서울화력발전소가 공급했다.

서울화력발전소의 몸값이 치솟자 정부는 이곳을 1등급 국가 보안시설로 정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발전소를 지키도록 했다. 정보기관 요원들은 수시로 발전소를 찾아 서랍이나 캐비닛에 잠금장치 없이 발전소 기밀을 보관하고 있는지 점검하기도 했다. 서울화력발전소의 작은 고장도 대형 사고로 다뤄졌고 직원들의 업무 강도도 다른 발전소와는 차원이 달랐다.

당시 신입사원이었던 도 씨는 “1970년대에는 매일같이 오전 7시 반에 출근해 오후 10시에 퇴근한 것은 물론이고 한번은 아내가 수술대에 오르기 직전 호출을 받고 발전소로 뛰어 돌아오기도 했다”며 “그래서인지 1981년부터 지금까지 32년간 한 건의 사고도 없었다”고 말했다.

○ 86년 역사 뒤로하고 공원으로 탈바꿈

서울화력발전소의 위상은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기 시작한 1980년대 들어 차츰 쇠락했다. 서울화력발전소가 공급하는 전력은 서울 전체 전기사용량의 3.7%까지 떨어졌다. 발전소를 지키던 군인들은 떠나고 철조망으로 덧씌웠던 높은 담벼락은 어른 키 높이로 낮아졌다.

발전소에 대한 주변의 시선도 점차 차가워졌다. 발전소가 내뿜는 매연과 연료를 실어 나르던 대형 트럭의 소음을 지적하는 민원이 쌓여갔다. 특히 1992년 7월 발생한 한강의 물고기 떼죽음은 치명타가 됐다. 한 달간에 걸친 원인 분석 끝에 서울시는 서울화력발전소가 한강에 배출한 높은 온도의 냉각폐열수가 물고기 떼죽음의 원인이 됐다고 발표했다.

서울화력발전소는 벚꽃길을 조성해 지역주민들에게 개방하고 발전 연료를 석탄에서 벙커C유로, 다시 매연 배출이 전혀 없는 액화천연가스(LNG)로 바꿨지만 높아진 생활수준과 함께 주변 지역 주민들의 불만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결국 1998년 당시 고건 서울시장은 서울화력발전소 이전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발전소를 옮기려 해도 받아줄 곳이 없었다. 결국 정부는 지난해 이 발전소를 현 용지 지하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발전소가 있던 터에는 2018년까지 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다.

도 씨는 지난달 27일 착공식에 옛 동료들과 함께 참석했다. 퇴직한 뒤에도 매년 4월이면 발전소에서 열린 벚꽃축제 때마다 돌아올 수 있었던 일터를 이제 한동안 다시 찾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착공식에 앞서 시작된 공사로 그와 동료들이 30년 전 심었던 99그루의 벚나무는 이미 절반 이상 잘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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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바친 발전소가 도시의 흉물로 손가락질을 받으며 사라지는 게 야속할 만도 한데도 도 씨에게서는 그런 내색을 찾기 어려웠다.

“전기가 꼭 필요하긴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다 보니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역할을 다하는 게 중요하지. 발전소가 제 할 일을 다하고 그 자리를 주민들에게 돌려준다니 그것만으로도 보람된 일이야.”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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