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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꾼 순간]“편의점 바나나우유 먹어봤어?” 백령도에 난리가 났다

입력 | 2013-10-26 03:00:00

신용불량자에서 ‘편의점 갑부’로 일어선 손도신씨




3년 전 백령도에 첫 편의점을 낸 손도신 씨(40)가 이달 초 백령도 사곶해수욕장을 거닐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손 씨는 2004년 가족을 두고 백령도로 들어와 이 해수욕장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는 장사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 한 장도 찍지 못하고 접었다. 백령도=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2004년 봄 인천 옹진군 백령도의 부둣가. 바다를 향해 걸터앉은 서른한 살 청년 손도신은 입술을 꽉 깨물며 생각했다.

‘그래, 여기 들어와 살자. 여기서 다시 시작하자.’

자동차 영업, 양말가게…. 손을 대는 것마다 다 망했다. 그래도 혼자 있을 땐 몸을 굴리며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다. 결혼을 하니 사정이 달라졌다. 아내와 갓 태어난 딸을 두고 ‘카드 돌려 막기’로 버티며 빚더미를 깔고 앉아있을 순 없었다.

채권추심 전화를 받는 것도 지겨웠다. 청계천 복개공사 현장에서 막노동이라도 하겠다며 집을 나왔다. 아내와 딸은 충남 조치원 처가에 보냈다. 어지러운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어찌하다 찾은 곳이 백령도. 1992년 공고를 졸업하고 자원입대한 해병대 자대가 있는 곳이었다.

전 재산은 현금 50만 원과 타고 온 중고 싼타페 한 대. 월세 35만 원짜리 방을 얻고 차에 기름을 넣으니 무일푼이 됐다. 부둣가로 나왔다. 각 잡힌 군복과 번쩍이는 군화를 신은 해병대 병사들이 면회 온 가족을 만나고 있었다.

‘나도 옛날엔 저랬었지. 그나저나 저 사람들은 섬 구경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자기 차가 없으면 불편할 텐데…. 아, 그래. 저런 사람들에게 내 차를 빌려준다면….’

쭈뼛거리며 다가가 차를 빌려주고 8만 원을 받았다. 이후 내친김에 ‘자가용 영업’을 계속했다. 불법이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치킨가게에 가 배달 일을 달라고 졸라 간신히 일감도 받았다. 아내에게 ‘막노동해 번 돈’이라며 생활비를 보냈다. 섬에 들어왔단 얘기는 한참 동안 꺼내지도 못했다.


백령도서 다시 시작한 ‘제2의 삶’

섬에선 마음이 편했다. 섬에 들어온 지 한 달 후 술에 취해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기야, 사실 나 백령도야. 보고 싶다. 유빈이(딸)랑 같이 와라. 우리 여기서 살자. 여긴 카드빚 추심하는 사람들도 안 와.”

아내는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결국 100일 된 딸을 안고 백령도행 배에 올랐다. 딸을 품에 안은 그는 새로 구한 반지하 월세방으로 가며 속삭였다.

“유빈아, 너는 절대로 고생 안 시킬 거야. 너는 교복 입는 좋은 학교 보내줄게, 꼭.”

서울에서 노란 교복을 입고 다니는 사립초등학교 아이들을 봤을 때부터 해왔던 생각이었다.

배달 일을 계속하면서 소형차를 한 대 더 사 렌터카로 굴렸다. 차 두 대를 다 빌려주고 나면 정작 자신은 ‘뚜벅이’ 신세. 부둣가와 치킨 가게, 집 사이를 매일 걸어 다녔다. 조금씩 돈을 벌었지만 빚은 줄지 않았다. 금융채무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인 것도 변함이 없었다.

입에 겨우 풀칠을 하며 살던 어느 날, 지인에게 공짜로 빌려줬던 차가 사고로 완전히 망가졌다. 너무 미안하다며 내미는 돈 중 1000만 원만 받았다. 이 기회에 장사나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동안 수없이 실패했지만, 그래서 이제는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005년 10월, 백령도 진촌리에 ‘싱싱청과’란 과일가게를 열었다. 이번엔 실패할 수 없었다. 일부러 육지에서 과일 장사하는 선배를 찾아가 노하우를 배워 왔다. 장사가 잘됐다. 마을 어르신들은 그를 ‘싱싱’이라고 불렀다.

아내는 배표를 파는 일자리를 얻었다. 육아는 그가 맡기로 했다. 장사하며 아기 밥 챙겨주고 기저귀 가는 일이 쉽진 않았지만 이렇게 한 달에 120만 원이 더 들어왔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장사를 키우고 싶어졌다. 2007년 봄, 배달 일을 그만두고 지인에게 돈을 빌려 치킨집을 냈다. 수입이 늘어나자 잠자고 있던 도전정신이 꿈틀거렸다. 아내에게 “이번엔 울릉도로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서쪽 끝’ 섬에서 ‘동쪽’ 섬으로 진출해 보겠다는 일종의 객기였다. 아내가 말렸지만 그는 2008년 말 울릉도에서도 치킨집을 열었다.

준비 없는 도전의 결과는 썼다. 울릉도에서의 장사는 신통치 않았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게 울릉도의 편의점이었다. ‘섬에도 편의점을 열 수 있구나.’ 눈이 번쩍 떠졌다. 편의점 본사에 전화를 걸었다. 백령도라도 좋은 자리가 있고 장사만 된다면 오케이란 답을 얻었다.

6개월 만에 가게를 정리하고 백령도로 돌아왔다. 여름 성수기 때는 바짝 치킨 장사에 열을 올리고 겨울엔 인천대교 제설작업을 하며 일당을 벌었다. 그러면서 편의점 개점 준비를 했다. 2010년 3월 백령도 해병부대 앞에 섬 역사상 최초의 편의점이 생겼다.


하루에 바나나맛 우유 700∼800개 팔아

백령도 진촌리의 ‘CU 백령도 2호점’에서 고객을 맞고 있는 손도신 씨. 이 매장은 전국 CU 매장 중 매출 상위 5%에 들 정도로 장사가 잘 되는 곳이다. 백령도=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백령도에 난리가 났다. 사람들이 편의점으로 몰려들었다. 깨끗한 가게 안엔 못 보던 물건이 즐비했다. 심지어 값도 전에 사먹던 것보다 쌌다. 전국의 물품 가격을 똑같이 유지하는 편의점 정책 덕에 물류비가 많이 드는 섬에서도 상품 가격이 육지와 같기 때문이었다.

최고 인기 상품은 ‘바나나맛 우유’. 처음에는 하루에 700∼800개씩 팔려 나갔다. 아이들이 특히 좋아했다. 우유에 빨대를 꽂고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인천 온 거 같아”란 말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금방 동이 났기 때문에 물건이 들어오는 날엔 동네 아줌마들이 “편의점에 바나나맛 우유 들어왔다”며 서로 전화를 돌리기도 했다.

돌아서면 배고픈 젊은 장병들도 과자며 냉동식품이며 음료수 따위를 한 바구니씩 담아 갔다. 관광객들도 좋아했다. 가게에 뜨거운 물이 없어 컵라면을 사고도 못 먹는 일이 편의점이 생기고부터는 사라졌다. ‘싱싱네 편의점’ 계산대는 쉴 틈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에 딸린 방바닥에 지도를 폈다. 서해의 큰 섬에 모두 동그라미를 쳤다. 그때부터 공격적인 점포 확장이 시작됐다. 백령도 2호점과 인천 옹진군의 대청도, 덕적도, 신도에 연이어 편의점을 냈다. 기존 점포들의 수입이 늘어나니 새 가게를 내는 것이 점점 쉬워졌다.

남해로도 눈을 돌렸다. 노화도와 보길도(전남 완도군), 욕지도(경남 통영시), 추자도(제주시)까지 손을 뻗쳤다. 지난해 봄, 그는 다시 서해로 돌아와 인천 강화군 교동도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2년간 수없이 배를 타고 이 섬, 저 섬을 전전하며 9개 섬에 편의점 10개를 열었다. 물론 그의 가게가 그 섬의 첫 편의점이었다. 편의점들은 문을 열자마자 섬 주민들의 ‘핫 플레이스’가 됐다. 하지만 그는 항상 섬 주민들과의 관계를 생각했다. 기존 가게가 있는 곳에서 가능한 한 먼 곳에 점포를 냈고, 계약을 마친 편의점을 아무 조건 없이 동네 가게 주인에게 양보하기도 했다. 몇몇 편의점은 권리금 없이 운영권을 섬 주민에게 넘겼다. 지금은 5개 섬에서 매장 6개를 운영하고 있다.

혼자서 많은 섬을 돌아다니며 운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지점’ 운영을 섬 주민에게 맡기기로 했다. 이제는 한두 달에 한 번씩 찾아가 점포가 ‘살아 있는지’ 확인할 뿐이다. 그래도 불안하지 않다.

“섬에선 괜찮은 일자리 찾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아주머니들이 편의점 일을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또 섬에는 착하고 부지런한 분들이 많아 맡겨 놓아도 걱정될 게 없습니다. 문제가 있었던 적도 없고요.”

편의점들이 하나같이 다 잘됐다. 백령도 2호점은 편의점 체인 매출 상위 5% 점포에 들어갈 정도다. 50만 원만 들고 들어갔던 섬에서 그는 만 10년 만에 연 매출 50억 원을 올리는 편의점 사장님이 돼 있었다. 렌터카와 편의점 사업을 찾아낸 눈썰미와 도전정신, 몸을 사리지 않는 근면함, 실패에서 배운 노하우 덕이었다.


“꿈 잃지 말길… 내가 그랬듯”

재작년엔 집을 인천으로 옮겼다. 배편이 많아 여러 섬을 돌아다니기 편한 데다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된 딸과의, 아니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유빈이는 교복 입는 사립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올해는 빚도 다 갚았다.

“며칠 전에 신용카드를 만들러 갔더니 발급이 되더라고요. 신기했죠. 10년 넘게 신용불량자로 살았는데 이젠 아닌 거죠. 눈물이 날 정도로 좋았습니다.”

여유가 생기자 섬과 군(軍)에 대한 고마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지난해엔 혹한기 훈련에 들어간 백령도 해병대원들을 위해 이동식 조리차량을 이용해 치킨 200마리를 무료로 제공했다. 이 일은 매년 할 생각이다. 지역 운동회 때에도 큰돈을 내놓고 있다. 이 밖에 섬 주민들에게도 보답하기 위한 길을 찾는 중이다.

“군 생활이 저를 섬으로 이끌었고, 군인들과 섬 주민들 덕에 먹고살 수 있게 됐어요. 그분들을 위해 뭔가 뜻깊은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는 인터뷰 내내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내 얘기를 들려주는 게 부담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섬 청년들이 화제로 올랐을 땐 목소리가 커졌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희망 없이 살더라고요. 대학 간다며 섬을 떠나면서도 뚜렷한 목표 없이 다들 ‘남들 가니까 따라 간다’고만 하고요. 제가 잘난 것도 없고 가방끈도 짧지만 떳떳하게, 그리고 항상 꿈을 안고 살았습니다. 섬 젊은이들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백령도=류원식 기자 rew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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