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근 부인 회사 사찰 움직임에 MB “하지마라” 했지만…
2011년 5월 9일 국회 의원회관 정태근 의원실에 모인 ‘새로운 한나라당’ 모임 소속 의원들(왼쪽부터 정태근 구상찬 김성태 정두언 의원). 이즈음 정태근의 부인이 대표로 있는 이벤트 회사에 서울지방국세청 조사팀이 들이닥쳤다. ‘정두언 그룹’은 다시 분노했다. 동아일보DB
2010년 9월 7일. 한나라당 안형환 대변인은 이명박(MB) 대통령이 안상수 대표와 월례회동에서 이렇게 강조했다고 브리핑했다.
신문과 방송은 MB의 ‘권력과 이권’ 발언이 김태호 국무총리,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이재훈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 낙마(落馬)’와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 특채’ 파문을 언급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 MB가 그 직전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제시한 ‘공정한 사회’ 구현 의지를 거듭 피력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아닌 게 아니라 ‘권력과 이권’ 발언은 대통령의 공개적인 코멘트로는 좀 이상하다 싶을 만큼 원색적이었다. 또 MB가 정두언 의원 부인의 화랑, 정태근 의원 부인이 ‘월급 사장’으로 있는 이벤트 회사, 그리고 남경필 의원 부인의 주얼리(보석상)에 대해 ‘걱정 반(半), 의심 반’의 시선을 갖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비단 세 사람의 부인뿐만이 아니었다.
2008년 6월 6일. 정태근이 ‘촛불 대책’의 일환으로 청와대 인사 개편을 역설하면서 박형준 전 한나라당 대변인의 이름을 꺼냈을 때도 MB는 “잘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며 고개를 저었다. 박형준의 부인도 부산에서 화랑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 화랑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보고서가 올라오고 있다는 얘기였다.
정태근은 곧바로 조현오 부산지방경찰청장(후에 경찰청장 지냄)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을 확인했다. 여러 가지 얘기가 있어 알아봤지만 사실무근이었다고 했다. 정태근은 김희중 대통령실 제1부속실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조현오 청장의 얘기를 대통령께 그대로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희중은 이명박 의원의 비서관, 이명박 서울시장의 의전비서관을 지낸, 말 그대로 ‘MB의 분신(分身)’이었다. MB는 그제야 의심을 풀었다.
정태근의 증언. “MB는 2007년 대선 직전에도 (후보 수행단장인) 나에게 ‘정두언, 박형준의 와이프들이 그림을 비싸게 팔고 있다는데 못하게 해!’라며 뭐라고 한 적이 있다. (흑색보고의) 뿌리가 그만큼 깊었다.”
정두언이 2010년 7월 한나라당 새 지도부를 선출하는 전당대회 경선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즈음 목 디스크 수술을 받은 정두언은 실밥 뽑는 날을 하루 앞당겨 가면서까지 최고위원 출마를 강행했다.
“그나마 최고위원이라도 하고 있어야 우리를 지킬 것 아니냐!” 걱정하는 정태근에게 정두언은 이렇게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안상수 의원이 1위를 차지해 대표 최고위원이 됐고, 정두언은 홍준표, 나경원 다음으로 4위를 했다.
새로 출범한 안상수 지도부는 8월 30일 충남 천안 지식경제공무원연수원에서 연찬회를 개최했다. 당의 ‘쇄신’과 ‘화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며…. 하지만 연찬회는 ‘정두언 그룹’의 SD 저격 소동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SD도 앉아 있는 자리였다.
“총리실 사찰 문제를 한번 봐라. 컴퓨터 자료를 다 파기하고 증거를 인멸했는데도 (고위급은) 아무도 문책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기강이 서지 않는 것 아니냐!” 박영준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정두언은 그러면서 SD를 한 번 쳐다본 뒤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 기자들이 에워싸자 정두언은 “영감(SD)이 앉아 있어서 나왔다. 압력을 주는 것도 아니고…”라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임태희=“우리 모두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 아니냐. 이제 그만 좀 하자.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정두언 정태근=“그걸 왜 우리에게 묻느냐. 청와대에서 해결해야 할 일 아니냐?”
임태희=“사실 여러 가지 얘기가 있었지만 대통령이 오히려 막아주고 계신다. 여하튼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다.”
임태희의 증언. “사실 정태근 의원 부인이 대표로 있는 이벤트 회사만 해도 ‘인천 쪽에서 (행사 발주를) 싹쓸이하고 있다’는 투서가 들어오고 그랬다. 그런 투서들이 많았다. 언젠가는 회의 때 누군가가 ‘한번 알아봐야겠습니다’라고 했지만 대통령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고 제지했다.” MB는 ‘정두언 그룹’에 대해 호루라기를 불면서도 다치게 하는 일은 막았다는 얘기다.
‘SD의 대리인’ 자격으로 달개비 모임에 참석한 이춘식은 “임태희 실장이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보장했고, 정두언 정태근 남경필도 ‘다시는 (사찰 문제를) 얘기하지 않겠다’고 합의했다. SD에게 전달하고 말고 할 이야기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두언 그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시적인 조치라고 해봐야 ‘SD맨’인 김주성 국가정보원 기조실장을 그만두게 한 정도였다는 것이다.
‘정두언 그룹’으로선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듬해 정태근의 부인이 경영하는 이벤트 회사에 국세청 직원 20명이 들이닥쳤다. 직원이 80명인 회사였다. 정두언은 이현동 국세청장을 찾아갔다. 이현동은 경북고와 영남대를 나온 TK(대구 경북) 출신이었다.
정두언=“광복 이후 (직원 80명인 회사에) 그 정도 조사인력을 투입해 석 달씩이나 세무조사를 한 사례가 있느냐.”
이현동=“갑자기 매출이 오르면 조사를 하게 됩니다. 통상적인 겁니다.”
이현동이 더이상 대답을 않고 입을 닫자 정두언은 국세청장 방에서 농성 아닌 농성을 벌였다. 몇 시간이 흘렀다. 퇴근 시간이 돼서야 이현동이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이 제 생일입니다.” 그러고는 나가 버렸다.
정두언은 울분을 넘어 ‘심통(心痛)’을 얻었다. 그 심통은 정두언을 MB 5년 내내 ‘정치적 멘붕’으로 내몰았다.
이재오가 ‘허당’이었다면(5월 18일자 ‘비밀해제 MB 5년-허당 이재오’ 참조), 정두언은 ‘바보’였다.
‘새 정부의 아키텍트(architect·설계자)’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고, 재선의 관록까지 갖춘 KS(경기고 서울대) 출신의 정치인. 더구나 나이도 51세. 정치적 포부를 펼치기엔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정두언은 그 아까운 시간을 박영준과 싸우는 데 허비하고 말았다.
“내가 생각해도 대단하다. 거대한 권력과 매일같이 이렇게….” 그런 푸념을 늘어놓으며 5년을 보내고 말았다.
정치를 생물이라고 하지만,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정두언은 박영준을 ‘어린애’로만 생각했다. 이춘식의 기억. “정두언과 박영준은 MB가 서울시장을 하고 있을 때부터 앙숙이었다. 박영준은 자기가 MB의 비서실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정두언은 박영준을 하급 보좌관 정도로 취급했다. 둘 사이에 사건도 많았다. 그건 SD도, MB도 잘 몰랐다. 하지만 MB가 당선되는 순간부터 박영준은 SD의 손에서도 벗어났다. SD가 도리어 뭘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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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준이 그 자리를 채웠다.
김창혁 선임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