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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국감의 속살

입력 | 2013-10-26 03:00:00

경총회장 “최악 기업감사” 비판에 野 증인신청, 국회에 무슨 일이…




국정감사가 열리는 국회는 회의장이든 밖이든 행정부의 ‘1년 농사’를 더 들춰내고 파헤치려는 의원들과 조금이라도 더 덮고 가려 보려는 공무원들이 자아내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22일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감장 밖 복도에서 공무원들이 바닥에 앉거나 서서 답변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정부와 기업, 국회는 매년 가을 서로 뒤엉켜 한바탕 홍역을 치른다. 연례행사인 국정감사가 열리는 것이다. 잘 살펴보면 국감은 행정부뿐만 아니라 정부 정책과 연관이 있는 기업 학교 언론 등 대한민국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최근에는 국회와 기업 간 긴장도가 더 강해 보인다. 그런 팽팽함이 25일 고스란히 드러났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민주당 김동철 의원은 이날 이희범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신청했다. 이 회장이 전날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경총 포럼 인사말에서 “올해 국정감사는 역대 최악의 기업 감사”라며 국회를 건드린 탓이 크다.

이 회장은 “그동안 경총과 언론, 수많은 전문가가 수차례 기업인 증인 소환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도 올해 국정감사에 역대 가장 많은 기업인이 증인으로 소환됐다”고 지적했다. 경총에 따르면 24일까지 201명의 기업인이 올해 국감 증인으로 채택됐다. 2011년에는 61명, 지난해에는 145명의 기업인이 국감장에 섰다. 그러나 김 의원은 “STX 계열사에 회장으로 가서 로비스트 역할을 했던 사람이, 지금 STX그룹 문제로 국부가 얼마나 유출됐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는데 무슨 자격으로 국민의 대표인 국회를 비난하나”라며 이 회장을 정조준했다. 결국 이 회장은 증인으로 채택되지는 않았다.

점잖아 보이는 국감의 수면 아래에서 ‘불러내려는 자’와 ‘막아보려는 자’, ‘들추려는 자’와 ‘감추려는 자’의 밀고 당기기가 치열하다. 종반으로 내달리는 올해 국감의 속살을 들여다봤다.  
▼ 한국지사장 국감 출석에 獨본사 “범죄라도 저질렀냐” ▼

불러내기 vs 가로막기

15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김효준 BMW코리아 사장(오른쪽에서 첫 번째) 등 기업인들이 선서를 하고 있다. 증인 선서를 하라는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한 브리타 제거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 사장(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 어색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제거 사장은 통역(뒷줄 왼쪽)의 설명을 듣고 뒤늦게 손을 들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회장님 출석 여부에 우리 목숨이 달렸습니다. 어떻게든 막아야죠.”

지난주 국회 의원회관 복도에서 만난 대기업 A사 대관(對官) 업무 담당자의 표정은 비장했다. 대관 업무란 기업에서 입법 행정 사법기관과 소통창구 역할을 하는 일을 말한다. 국감이 열리지 않을 때 대관 업무 담당은 국회에서 기업과 관련된 법률이나 정책이 만들어지는지 잘 살펴 기업 의견을 전달하는 일을 주로 한다. 그러나 국감 시기에는 소속 기업의 총수(오너)나 최고경영자(CEO)가 증인으로 채택돼 곤욕을 치르지 않도록 하는 일이 최우선이다. 대기업 대관 팀의 운명은 매년 국감을 어떻게 치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이 국정감사 증인 명단에서 제외된 과정도 흥미진진하다. 당초 산업통상자원위원회는 15일 유통업계 강자인 롯데그룹의 골목상권 침해, 협력사 대리점 가맹점 상대 불공정행위, 일감 몰아주기를 문제 삼아 신 회장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20일 롯데그룹이 민주당과 공정한 갑을(甲乙) 관계를 위한 상생협력기구를 만들기로 합의하자 기류가 급변했다. 국회 안팎에서는 상생협력기구 구성 합의가 롯데그룹의 ‘회장님 구하기’ 차원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았다. 롯데그룹이 성의를 보여 민주당의 체면을 높여준 만큼 최악의 경우 신 회장이 증인으로 출석하더라도 큰 수모를 당하지 않으리라는 얘기도 돌았다. 결과는 예측을 벗어나지 않았다.

국회 보좌진이나 대관 업무 담당자들 사이에서는 최근 신세계그룹 대관 팀이 동정의 대상이다. 롯데그룹이 자신의 회장을 막판 뒤집기로 구해낸 반면 신세계는 애써 증인 명단에서 빼냈던 정용진 부회장을 다시 증언대에 세울 수밖에 없게 됐다. 정 부회장보다 실무를 잘 안다며 의원들을 설득해 대신 내세운 이마트 대표이사가 산자위 국감에서 부실 답변 논란을 빚자 성난 여야 의원들이 정 부회장을 증인으로 다시 채택해 버렸다.

대관 팀 실무자의 1차 임무는 어느 의원이 자신의 회사 누구를 국감 증인 명단에 올리려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만약 오너를 직접 부르겠다고 고집하면 말 그대로 ‘회사가 뒤집어진다’. 대기업 B사는 오너나 오너 가족이 출석 의무가 없는 참고인 명단에조차 오르도록 하면 안 된다는 게 불문율임이 널리 알려져 있다.

빼내기 vs ‘보상’하기

올해 국감에서는 경제민주화라는 커다란 이슈 속에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롯데 등 재계 서열 상위 10위권 그룹은 국회 대관 팀을 풀가동하며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다. 증인 채택을 무마하기 위해 그룹 차원에서 전방위적인 로비를 벌인다. 의원과 학연 지연 혈연관계가 조금이라도 있는 최고위층 인맥들도 ‘회장님 지키기’에 총동원됐다. 의원들은 “국감을 앞두고 기업 회장이나 CEO를 증인에서 빼달라는 로비에 수도 없이 시달린다”고 귀띔한다. 넣고 빼기의 줄다리기 끝에 200여 명의 숫자가 나온 셈이다.

의원들이 기업인들을 불러내려는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다른 속셈’이 작용할 때도 있다. 증인 명단에 오른 오너 및 회장을 빼거나 아니면 적어도 이들이 아닌 실무 총책임자가 대신 국감장에 나서게 하려면 의원실과 ‘거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은밀한 거래’는 확인이 쉽지 않다. 대기업 C사 대관 업무 담당자는 “오너나 회장에서 부사장 등으로 한 단계 낮추는 단가가 수천만 원이라는 얘기도 있다”고 말했다. 반면 대기업 D사 관계자는 “증인의 격을 낮춘다기보다는 아예 오너나 CEO를 증인 명단에서 삭제하는 데 집중한다”고 말했다.

의원 측이나 기업 관계자 모두 예전처럼 사전 협상 단계에서 “(회장이나 CEO를) 증인에서 빼주면 얼마를 주겠다”는 식의 일처리는 상상하기 어렵게 됐다고 주장한다. 여의도 호텔 로비에서 심야에 만나 돈이 든 쇼핑백을 건네는 일은 옛일이 됐다는 것이다. 야당 보좌관 E 씨는 “기업들이 섣불리 ‘얼마면 되겠느냐’고 했다가 상대 의원실에서 ‘돈으로 구워삶아 증인 채택을 막으려 했다’고 공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한데 그렇게 하겠느냐”고 했다. 수사 대상에 오를 수도 있어 위험하다는 설명이다. 대기업 F사 대관 팀 실무자도 “선배들은 10여 년 전에는 그런 거래가 가능했다고 하는데 국회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드러나는 직접적인 거래는 없지만 시간이 지난 뒤 적절한 보상을 하는 방식은 여전히 쓰이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한 재선 의원 보좌관 G 씨는 “약속을 하지는 않지만 대기업들은 해당 의원 후원금 계좌로 합법적인 정치자금을 보내 사례를 하기도 한다고 들었다”며 “액수는 2000만∼3000만 원을 직원이나 지인 명의로 6, 7명씩 500만 원 이하로 나눠 넣는다고 한다”고 했다. 최근에는 사회공헌예산을 책정하는 대기업이 사내 사회공헌팀을 통해 해당 의원의 지역구에서 집 고쳐주기, 작은 도서관 지어주기 등의 공익사업을 벌이거나 각종 지역행사를 후원하는 방식으로도 후사(厚謝)를 한다고 알려졌다. 의원과 가까운 친인척의 복지재단 등에 기부금을 내는 새로운 방식이 활용된다는 소문도 나돈다.

최근 여러 대기업이 대관 팀을 확대하는 이유도 오너나 회장을 증인 명단에서 삭제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는 국회 분위기와 관련이 깊다. 국감 직전에 거래를 통해 손을 쓰기가 어렵기 때문에 인원을 늘려 평소 관계를 돈독히 해둘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증인 채택에 적극적인 야당 의원들의 눈치를 보긴 하지만, 여대야소 국회이다 보니 대부분 상임위에서 수가 많은 여당이 찬성해주지 않으면 증인 채택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한 대관 팀에서는 여당 의원들을 집중 공략하는 경우가 많다. 상임위원장실의 야당 보좌관 H 씨는 “기업 대관 팀 실무자가 ‘여당이 반대하면 그만인데 무엇 하러 야당에 매달리느냐’고 내 앞에서 이야기하는 걸 보고 좀 기가 찼다”고 말했다.

여당 중진 의원은 “재벌 총수가 국감에 출석하면 여론의 주목도가 훨씬 높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야당은 필요 이상의 기업인 출석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며 “경제위기 상황 속에서 경영활동 위축을 가져올 수 있는 야당의 과도한 기업인 출석 요청에 그대로 응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라고 했다.

외국계 기업 본사는 한국 지사장의 국감 출석에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15일 정무위 공정거래위원회 국감에는 국내 자동차시장의 불공정행위 관련 심문을 위한 증인으로 수입자동차업체인 BMW코리아 김효준 사장과 브리타 제거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 사장이 수입차 업체 사장으로는 처음 출석했다.

김 사장은 “국감 출석을 요구받았다고 독일 본사에 보고하자 본사 임원이 깜짝 놀라 ‘범죄라도 저질렀느냐’고 되물어왔다. 위법 사실이 없다고 답하자 그럼 대체 거길 왜 가야 하냐며 당혹스러워하더라”고 전했다.

면박주기 vs 실소하기

“불완전 PC를 팔았단 말이에요, 불완전 PC를!”

동양그룹 사태가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던 18일 국회 정무위원회 금융감독원 국정감사에서 새누리당 중진 I 의원은 이렇게 호통을 쳤다. ‘금융당국 책임론’에 직원들 모두 죄인처럼 고개를 떨어뜨렸지만 I 의원에 호통에 사무실 곳곳에서는 “쿡쿡” 하는 웃음이 터졌다. 동양그룹 계열사가 발행한 CP(기업어음)를 PC(개인용 컴퓨터)로 잘못 지칭한 것이다.

5분이 지나도록 CP를 PC로 말하던 I 의원은 보좌관과 옆자리 의원의 지적에 질의 후반부에야 CP라고 정정했다. 말실수를 정정한 뒤에도 해당 의원은 동양 사태의 내막과 동떨어진 질문으로 피감기관 증인들을 침묵에 빠뜨렸다. 금감원 관계자는 “그 자리에서야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지만 엉뚱한 질문을 하거나 호통치는 의원들 대하기가 가장 수월하다”고 말했다.  
▼ “현장서 호통쳐야 맛이 나지” 화상회의 원격국감 무산 ▼

23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김용환 수출입은행장(왼쪽)이 국정감사 질의를 앞두고 답변 내용을 논의하는 모습. 국감장에선 기관장이 직원들의 도움을 얻어가며 답변을 하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같은 ‘식구’였던 의원이 충분한 내용 파악 없이 국감에 참여해 직원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기획재정부 국감에서는 차관을 지낸 두 의원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새누리당의 김광림 류성걸 의원이 주인공이다. 김광림 의원은 2003년 재정경제부 차관을, 류성걸 의원은 2010년에 기재부 제2차관을 지냈다.

기재부의 한 과장급 공무원은 “한 의원은 정책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대안까지 제시해줘 직원들 사이에서 평가가 좋았다”며 “반면 다른 의원은 같은 차관 출신인데도 이전 직장 직원을 상대로 하는 국감을 호통과 고함으로 모두 채워 원성을 샀다”고 말했다.

1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기재부 국정감사 현장. 세종청사에서의 첫 국감이 열리자마자 증인 채택 문제를 두고 여야 의원들의 고성이 오갔다.

“총수 일가를 국감 증인으로 채택하자는 데 반대한 것은 재벌과의 유착을 보여준 것 아닙니까?”(김현미 민주당 의원) “동료 의원한테 그렇게 모욕적인 발언을 할 수 있습니까? 사과하십시오.”(이한성 새누리당 의원)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국감 선서를 한 뒤 자리에 앉자마자 시작된 여야 간 설전은 이후 40여 분 이어졌다.

국감이 정치적 논쟁의 장으로 변질될 것이라는 점은 이달 초 화상회의 시스템을 이용한 ‘원격국감’이 무산될 때부터 예견됐다. 당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세종시까지 이동하는 시간과 경비, 현장 공무원이 의전에 과도하게 신경 써야 하는 문제 등을 고려해 시범적으로 기재부 국감을 화상회의로 진행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협의 과정에서 일부 의원이 강하게 반대했다. 여러 논리를 댔지만 현장에서 고함지르고 호통을 치고 해야 ‘국감 하는 맛’이 난다는 뜻도 깔려 있었다는 관측이다. 기재부 공무원들은 의원 간 고성 경쟁에도 무덤덤해했다.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눈을 붙이는 간부급 공무원들도 눈에 띄었다. 현 부총리도 지루한지 앞에 놓인 탁자만 손가락으로 연방 두들겼다.

기재부의 한 관계자는 “의원들도 질문을 한 뒤 답변을 충실하게 들어야 오해했던 부분도 풀릴 텐데 TV 생중계 화면에 누가 더 오래 나오나 경쟁하듯 좀처럼 답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피감기관을 비합리적으로 윽박지르는 행태는 다른 부처나 공기업 국감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17일 열린 한국수력원자력 국감 현장에서는 지난달 취임한 조석 사장을 두고 한 의원이 조 사장이 취임하기 전 일어났던 한수원의 비리를 지적하며 “책임지라” “사표 낼 각오가 돼 있느냐”고 추궁했다.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야당의 한 의원은 보도자료와 국감장에서 종합편성채널 가운데 채널A의 경우 9월과 10월 첫 주의 편성표를 분석한 결과 제작건수 13건 중 시사·보도 프로그램이 11건에 달해 전체의 84%에 달한다고 질의했다. 이에 대해 이경재 방송통신위원장은 “보도 프로그램 비중은 프로그램 꼭지 수로 계산하는 게 아니라 전체 방송 시간으로 계산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이 의원은 프로그램 편성 비중의 계산법을 착각해 잘못된 수치를 인용한 것이었지만 정정하지 않았고 몇몇 언론은 잘못된 자료를 그대로 인용해 기사에 싣기도 했다.

들춰내기 vs 덮기

14일 미래창조과학부는 조직 출범 후 첫 국감을 맞았다.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 의원들이 미래부에 요구한 자료는 무려 6500건. 자료 1건당 A4 용지 한 장씩만 치더라도 300쪽(A4 용지 1장당 소설 2쪽 가정)짜리 소설 40여 권에 해당하는 방대한 양이다. 이를 준비한 미래부의 자료담당 직원들은 10월 들어 하루도 쉬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래부의 한 관계자는 “대부분은 정말 필요할 것 같지 않은 자료들”이라며 “국감 자료 만드느라 기존 업무는 거의 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특히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이동통신사들의 경영전략이 고스란히 담긴 기업 내부 자료를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밤을 새워 가며 준비한 자료들이 90% 넘게 국감장에서 쓰이지도 않고 사장된다는 점이다.

새누리당 초선 의원실 보좌관 J 씨는 “솔직히 국감은 의원과 보좌진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무대다. 더 기억에 남는 질의, 새로운 자료를 받기 위해 올인(다걸기)하는 거다”라고 말했다. 무리한 자료 요구를 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 대한 해명이었다. 방대한 자료에 질린 일부 보좌관은 예산정책처 등에 아예 질의자료를 부탁해 받은 그대로 질의서를 만들기도 하고, 어떤 보좌관은 감사원 감사 결과를 뒤져서 이미 지적된 사안을 그대로 질의로 만들어 피감기관을 추궁하는 데 쓰기도 한다.

물론 자료의 광산을 헤집고 파헤쳐 귀중한 원석을 찾아내는 의원과 보좌진도 있다.

새누리당 재선 의원실 보좌관 K 씨는 “보통 10건의 제보가 들어오면 한두 건이 근거가 있는 정보”라며 “그럴듯한 제보라도 정부 부처가 끝까지 숨기고 자료를 제공하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는 만큼 하나의 제보를 국감장의 질의로 만들어내기까지는 몇 개월이 걸린다”고 말했다. ‘확실한 제보’는 간간이 찾아오는 행운일 뿐이기 때문에 의원과 보좌진은 국감을 준비하며 수천∼수만 장의 자료와 문서, 기사 등에 파묻혀 지낸다. 민주당 보좌관 L 씨는 “해당 부처의 감사원 감사 결과부터 지난 국감 기사, 1년에 10만 건이 넘게 생산되는 정부 부처의 문서수발 대장, 정부 부처에서 보내오는 기본 국감자료 등을 검토하려면 적어도 1, 2주간은 새벽이 돼야 퇴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료의 압박에 눌린 공무원 가운데 부실한 답변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도 있다.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실은 국감이 시작되기 전인 이달 초 기재부로부터 받은 답변 자료에서 희한한 내용을 발견했다. 이 의원실의 질의는 ‘기업 규제가 증가하는데 어떻게 일자리 창출이 되는지?’였다. 그에 대해 기재부 모 과장은 ‘기업 규제가 증가하면 기업들의 일자리 창출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달랑 한 줄짜리 답변을 붙였다. 이 의원실의 보좌관은 “기재부 과장이면 엘리트인데 전혀 그런 사람답지 않은 답변이지요. ‘이 사람이 많이 귀찮았나?’ ‘우리와 친한 척하려는 건가?’ 아무튼 황당했어요.”

부실 준비 vs 부실 국감

정권 첫해의 국감은 여당 의원들에게 곤혹스럽다. 삼권분립이라는 헌법 원칙에 입각해 하는 국회의 정부 감사지만 청와대의 눈치도 보여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준비를 소홀히 하는 일도 적지 않다.

국회 정무위 소속 새누리당 의원 보좌관 M 씨는 금융사건과 관련해 ‘한 건’을 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아냈지만 “그냥 넘어가자”는 의원의 말에 자료는 책상 서랍 깊은 쪽에 처박아 놓았다. 보건복지위원회 소속의 같은 당 의원 N 씨는 국감에 앞서 “피감기관과 정부 쪽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상황을 만들지 말고 정책 대안 위주의 자료를 만들라”고 지침을 내렸다. 같은 당 영남지역 O 의원도 보좌진에게 너무 공격적인 자료를 찾지 말라고 당부했다. 행정고시 출신인 이 의원은 자신의 고시 선후배가 여전히 정부 고위 관계자이기 때문에 이들과 껄끄러운 사이가 될까 봐 우려한 것이다. 새누리당 고위 당직자인 P 의원은 “어떻게 여당의 핵심 당직자가 정부를 세게 비판할 수 있겠느냐”며 스스로 행정부 감사의 꼬리를 내려버리기도 했다.

보건복지위 소속 새누리당 Q 의원은 국민연금과 관련된 정부 부처에 야당 의원들뿐만 아니라 여당 의원들이 요구한 자료 일체를 자신에게 보고하라는 뜬금없는 지시를 내려 빈축을 사기도 했다. 국민연금과 연계한 정부의 기초연금안이 공약 파기 논란에 휩싸이자 정부를 옹호하기 위한 답변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이 공무원들의 생각이다. 이 소식이 국회에 퍼지자 복지위 소속 같은 당 의원들조차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해마다 반복되는 질의도 부실 준비가 낳은 문제다. 국정감사NGO모니터단은 23일까지 모든 상임위의 국정감사를 모니터한 결과 중간성적으로 C학점을 매겼다고 밝혔다.

전국 27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하여 국감을 모니터하는 국정감사NGO모니터단은 올해 국정감사가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등에 매몰돼 민생, 일자리, 소상공인 정책, 사법 및 검찰 개혁 등의 문제가 제대로 거론되지 않았다고 총평했다.

모니터단은 올해 국감의 특징으로, 한낮에는 파행을 빚으며 허송세월을 하다가 늦게 국감이 시작되어 심야까지 진행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지적했다. 모니터단의 집계 결과 올해 심야 국감은 14차례 있었다. 교육부 한 간부는 “국감이 늦게 끝나니 서로 많이 지친다. 요즘은 신사적으로 많이 지키는데 특히 피감기관 앞에서 자기들끼리 별거 아닌 거 가지고 장시간 싸우는 것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모니터단은 해마다 반복되는 중복질의를 막으려면 지난해 시정처리 요구 사안에 대한 철저한 이행 여부 점검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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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감은 그야말로 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한 한 해 성적표를 매기는 행위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는 기본이다. 국정 전반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정부의 잘잘못을 가려 이듬해 더 나은 점수를 받도록 하는 게 국감의 본래 취지이지만 박근혜 정부의 첫해 국감도 예년과 별반 달라진 게 없이 종반으로 치닫고 있다.

길진균·권오혁·김창덕·송충현 기자 l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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