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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상대 1억 손배소 낸 탈북자 손인남씨의 사연

입력 | 2013-10-28 03:00:00

“국군포로 아버지와 2002년 死地탈출…정부 늑장탓 북송”




국군포로의 아들 손인남 씨가 북한에서 찍은 아버지 손기선 씨의 사진을 들고 탈북 당시 얘기를 하고 있다. 아래쪽은 아버지의 병적 증명서로 1950년 10월 10일 전사한 것으로 기재돼 있다. 아들 손 씨는 2002년 아버지와 함께 탈북했다가 체포돼 강제 북송된 뒤 2005년 홀로 재탈북해 남으로 넘어왔지만 지금까지 아버지의 생사를 모른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2002년 12월 16일 오후 8시. 영하 20도의 추위에 해진 겨울옷 하나만 걸친 채 손인남 씨(당시 42세)는 팔다리를 거의 쓰지 못하는 70대 아버지를 등에 업고 함경북도 무산에서 두만강을 끼고 달리는 소형 기차에 몰래 숨어들었다. 그는 두만강 폭이 가장 좁다고 알려진 곳에서 아버지를 안고 뛰어내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두만강가에는 50m 간격으로 탈북자를 막기 위한 초소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는 보초들의 눈을 피해 아버지를 업고 폭 10m 정도 되는 꽁꽁 언 두만강을 10분 만에 넘었다. 꿈에 그리던 탈북에 성공한 것이다.

손 씨는 함경북도 청진시 송평구역에서 4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그는 아버지를 자주 보지 못했다. 함북 온성의 상화탄광 청년갱도에서 일하는 아버지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줄 때가 유일하게 아버지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비쩍 마른 몸에 웃음기 없이 피로에 찌든 새까만 얼굴로 아들을 맞았다. 그러곤 입버릇처럼 “고향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손 씨는 철이 들면서 그 고향이 남한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송평고 재학 시절 갱도를 찾은 아들이 고향이 어디시냐고 묻자 아버지는 드디어 입을 뗐다.

손 씨의 아버지 손기선 씨는 국군포로였다. 1929년 1월 충북 청원군 강내면 학천리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1950년 9월 19일 육군 5사단의 보병으로 입대했고 52년 강원도 양양의 한 골짜기에서 중공군에게 붙잡혀 북한으로 끌려갔다.

아버지는 전향을 요구받았으나 “민족과 조국에 대한 배신”이라며 끝까지 버텼고 다른 비전향 국군포로 40여 명과 함께 중노동을 하는 온성의 탄광으로 보내졌다. 아버지는 탄광식당에서 일하던 고아 출신 어머니를 만나 결혼해 네 아들을 낳았다.

국군포로의 아들이라는 출신 성분은 늘 손 씨를 괴롭혔다. 같은 반 급우들은 “너네 아버지는 괴뢰군 포로”라며 그를 따돌렸다. 1978년 9월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에는 ‘군사동원부’에서 나온 사람들이 교실에 들이닥쳐 그를 포함해 출신 성분이 좋지 않은 학생 12명을 그 자리에서 징집했다. 그는 황해도 개성에 있는 인민군 2군단 산하의 소위 ‘총알받이 부대’에 들어갔다. 총알받이 부대는 전쟁이 났을 경우 초반 5분의 시간을 벌기 위해 육탄 방어하는 부대를 뜻한다. 그는 1984년 7월 10일까지 복무했다.

제대 후에도 변변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일거리를 찾아 집을 나갔던 동생 3명도 사망하거나 행방불명이 됐으며 1989년엔 어머니마저 숨졌다. 아버지는 탄광에서 발생한 대형 폭발사고로 큰 화상을 입고 불구가 됐다. 아버지를 홀로 돌보던 그는 고향에 가고 싶다는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아버지를 등에 업고 한겨울의 두만강을 건넜다.

두만강을 건넌 그는 밀수를 같이 하며 친해진 후배의 주선으로 중국동포 A 씨가 사는 집으로 찾아가 탈북 전문 브로커인 B 씨를 만났다. B 씨는 손 씨 앞에서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국방부의 한 중령에게 전화를 걸어 탈북한 국군포로의 남한행에 대해 상의했다. 손 씨 부자는 ‘이제는 남한으로 갈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B 씨는 곧 남한으로 갈 방법을 찾아주겠노라고 말하고 인근 야산에서 당분간 숨어 지내라고 했다. 그날 밤 손 씨는 아버지를 업고 인근 야산에 몸을 숨겼다. 다행히 사냥꾼들이 임시 거처로 쓰던 작은 폐가가 있었다. 그러나 브로커의 연락은 없었고 탈북 아흐레 만인 12월 26일 오후 5시 폐가에 몰려든 중국 인민해방군에 붙잡혀 북송됐다.

북송된 탈북자에게 돌아온 건 북한 보위부의 극심한 고문이었다. 손 씨는 긴 쇠막대로 마구 맞아 오른쪽 쇄골이 부러졌고 왼쪽 턱이 내려앉았다. 참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 소식을 몰라 더 힘들었다. 보위부는 이들 부자를 따로 심문했고 이후 다시는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다. 청진군의 교도소 두 곳에서 1년 반의 수감 생활을 마친 그는 아버지의 행방을 애타게 찾았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손 씨는 2005년 6월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다시 탈북했고 내몽골과 몽골을 거쳐 1년 6개월 만인 2006년 12월 26일 인천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손 씨는 남한에 도착한 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았다. 가장 놀란 것은 아버지가 1950년 10월 10일에 사망한 것으로 병적증명서에 기록돼 있는 것이었다. 이는 남한 정부가 현재 북에 남아 있는 국군포로의 신원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손 씨는 23일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을 통해 국가를 상대로 1억 원짜리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손 씨는 “탈북 브로커로부터 국군포로가 있다는 사실을 전달받은 국방부 소속의 중령이 늑장 대처해 아버지가 강제 북송됐다”고 주장했다. 27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손 씨는 “아버지처럼 북한에 있는 국군포로의 명예를 회복하고 남한에 반드시 데려오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며 “수십 년 동안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지옥 같은 탄광에서 일만 했던 국군포로들을 대한민국이 기억하고 데려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연상 기자 bae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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