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극인 도쿄 특파원
‘강한 일본’을 되찾겠다는 아베 총리는 외할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일본 재건을 위해 신념을 관철한 정치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는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의 아들이지만 기시 노부스케의 DNA(유전자)를 이어받았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아베 총리의 몸속엔 또 하나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 그가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는 친할아버지 아베 간(安倍寬·1894∼1946) 얘기다. 일본을 전쟁으로 이끈 도조 내각과 첨예하게 맞섰던 그는 기시와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정치인이다.
같은 야마구치 현 출신이면서도 전쟁과 평화라는 정반대 이미지의 상징이던 기시와 간은 한때 의기투합했다. 기시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도조 당시 총리에 반발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일본 패전의 기운이 짙어지자 기시는 도조를 배신했다. 전후 살아남기 위한 계산에서였다. 간은 얼마 후 세상을 떠났지만 당시 짧은 인연으로 간의 외아들 신타로와 기시의 장녀 요코(洋子)는 훗날(1951년) 결혼에 이르게 된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이 아베 총리다.
아베 총리는 ‘싸우는 정치가’를 정치 신념으로 삼고 있다. 1960년 야당과 좌파 세력의 반대 속에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관철시킨 외할아버지가 역할모델이다. 하지만 진짜 싸우는 정치가는 외할아버지가 아니라 군부 독재에 맞섰던 친할아버지였다는 게 일본 정치학자들의 평가다.
아베 총리는 일찍 세상을 떠난 친할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어린 시절 그가 외할아버지가 아니라 친할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자랐다면 정치인으로서 그의 길은 크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아베 간이라면 지금 일본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까. 동북아의 긴장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요즘, 아베 총리의 몸속에 흐르는 또 하나의 DNA에 주목하고 싶다.
배극인 도쿄 특파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