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Narrative Report]혼자만 잘 뛰면 무슨 재미? 달려라 ‘광마모’

입력 | 2013-10-31 03:00:00


‘광화문마라톤모임(광마모)’ 회원들이 26일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서울 잠실의 탄천변을 달리고 있다. 2001년 출범한 ‘광마모’는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니라 풀코스를 5회 이상 완주한 고수이면서 봉사 정신이 투철한 마라토너들이 가입할 수 있는 단체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 “내년 내 목표는 3시간28분30초∼.” 26일 서울 잠실야구장 옆 풋살구장을 출발해 탄천을 따라 영동1교까지 왕복 약 13km를 달리고 맨 먼저 들어온 전병혁 씨(23)의 얼굴엔 ‘해냈다’는 성취감이 가득했다. 올 3월 2013 서울국제마라톤대회 겸 제84회 동아마라톤대회 마스터스 부문 풀코스에 출전해 3시간45분37초의 개인 최고기록을 낸 그는 내년 동아마라톤에서 새로운 기록을 세우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그는 “달리면 힘들지만 완주하면 기분이 상쾌하다. 기록을 단축하는 것도 재밌다”며 활짝 웃었다. 전 씨는 발달장애 2급. 사회성 발달장애(일종의 자폐)로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지내던 과거와 달리 이젠 경쟁도 배우고 남과 함께 살아가는 것도 알게 됐다. 모두 마라톤의 즐거움을 알게 해준 ‘광화문마라톤모임(광마모)’ 덕분이다. 》  

22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열린 제94회 전국체전 육상 여고부 포환던지기에서 15.21m를 던져 여고부 한국신기록으로 우승한 한국판 ‘여자 헤라클레스’ 이미나(18·이리공고)에게는 사실 올해가 최악의 해로 남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암으로 8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파킨슨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방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이 버텼던 배경엔 ‘광마모’가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 2007년부터 어려운 환경에서 운동하는 선수들을 돕는 ‘달려라 하니’ 프로그램을 통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받은 ‘광마모’의 따뜻한 분들을 생각하면 방황은 사치였다. 힘들고 외로웠지만 ‘광마모’가 있어 든든했다. ‘광마모’ 회원들은 이번 전국체전 때도 경기장을 방문해 격려와 박수를 보냈다. 이미나는 전국체전 3연패 등 소년체전을 포함해 체전에서만 8연속 우승이란 금자탑을 쌓았다.

○ 참여-헌신의 ‘광화문마라톤모임’

1999년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마라톤을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 ‘네티즌마라톤 광화문모임’으로 시작한 ‘광마모’의 모토는 참여와 봉사다. 2001년 12월 ‘광화문마라톤모임’으로 이름을 바꾸고 2002년부터 봉사정신이 투철한 마스터스 마라토너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1994년 국내 최초로 마스터스 부문을 만들어 마라톤 붐을 일으킨 ‘동아마라톤’의 여파로 숱한 동호회가 생겼지만 ‘광마모’는 시작부터가 달랐다. 여타 동호회가 친목 도모가 주목적이었다면 ‘광마모’는 봉사가 첫 번째였다.

‘광마모’ 회원이 되기 위해선 소문이 잘 나야 한다. 혼자 잘 달린다고 되는 게 아니다. 항상 남을 배려하고 도우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풀코스를 5회 이상 완주한 마라톤계의 고수이면서 봉사정신이 투철한 달림이들을 전국 각지에서 추천받아 회원으로 뽑는다. 추천을 받는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6개월 인턴 기간을 둔다. 이 기간 봉사 상황을 체크한 뒤 최종 낙점한다. 매년 기수별 회원을 모집해 올해 14기까지 483명을 모았다. 회장도 봉사를 통해 조화와 화합을 이룬다는 의미가 담긴 ‘코디(코디네이터)’로 부른다. 임기는 딱 1년. 한택운 2013년 코디(57)는 “우리 동호회의 목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봉사와 자선이다. 회원들이 그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마모’는 수도권과 영남, 호남, 제주, 충청, 강원 등 6개 권역으로 나뉘어 서로 협력하면서도 독자적인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시작은 단순했다. 좀 더 잘 달리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앞에서 끌어주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자는 것이었다. 마라톤 풀코스는 아무리 훈련을 잘해도 웬만해선 완주하기 힘들다. 달리다 포기하는 사람을 지켜본 뒤 ‘우리가 도와보자’면서 시작한 게 페이스메이커였다. 올해만 현재까지 86개 대회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페이스메이커는 물론이고 주로에서 위급상황 때 도움을 주는 레이스패트롤까지 함께 하고 있다.

도움과 봉사는 양성 바이러스 같다. 전이가 쉽게 된다. 한번 도움을 주기 시작하자 회원들은 자연스럽게 좀 더 의미 있는 봉사를 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2001년 5월부터 십시일반으로 장애인들에게 마라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액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음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는 데서 즐거움을 찾았다.

발달장애 2급 판정을 받은 전병혁 씨(앞)가 서울 잠 실종합운동장 옆을 달리고 있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2005년 더 색다른 봉사에 눈을 돌리면서 ‘하트 발달장애아 마라톤교실(하트)’과 ‘달려라 하니(하니)’란 프로그램이 나오게 됐다. ‘하트’는 지금까지 약 30명의 발달장애인에게 새로운 삶을 찾아줬다. 마라톤은 신기하게도 영화 ‘말아톤’같이 발달장애인들을 변화시켰다. 발달장애인은 사회성이 부족하다. 또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경쟁할 줄 모른다. 그런 그들이 바뀐 것이다.

전병혁 씨는 함께 달렸던 회원이 오지 않으면 전화를 건다. “선생님, 왜 안 나왔어요?”라고 물으며 “다음엔 꼭 나오세요”라고 말한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성이 아주 크게 향상된 것이다. 전 씨는 중학교를 다니던 2005년 ‘광마모’와 인연을 맺었다. 자폐증 환자의 홀로서기를 그린 ‘말아톤’이 개봉해 감동을 주던 당시 하트하트종합복지관(현 하트하트재단)이 발달장애 아동들을 위해 마라톤을 통한 희망 찾기 프로그램을 만들고 도움을 청했을 때 흔쾌히 자원봉사로 나선 곳이 ‘광마모’였다. ‘광마모’는 2년 뒤 복지관이 ‘하트’에서 손을 뗀 뒤에도 학부모들과 힘을 합쳐 지금까지 매주 토요일 잠실과 경기 광명에서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달리고 있다.

처음부터 ‘하트’에 참여한 전미라 회원(55)은 “남을 의식하지 않던 아이들이 경쟁을 하고 우리를 가족같이 대하는 것을 보고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26일 마라톤을 마친 뒤 열린 100m 인터벌 훈련. 전병혁 씨는 동갑내기 김민철 씨와 서로 1등을 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경쟁했다. 김 씨가 몇 번 이기자 전 씨는 풀이 죽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전 씨는 “풀코스는 내가 더 잘한다. 내년 내 목표는 동아마라톤에서 3시간28분30초 안에 달리는 것이다”라며 웃었다. 전 씨는 마라톤을 통해 장애가 크게 호전돼 서울장애인복지관 보호작업장 파닉스에서 빵 만들기를 배우고 있다. 마라톤 훈련 등도 보호자 없이 혼자 다니며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다.

식사 조절을 하지 못해 뚱뚱해진 발달장애 아이들이 운동을 통해 살이 빠지고 건강해지자 체중계에 올라서며 몸무게를 체크하고 먹는 것도 조절할 줄 알게 됐다. 전 씨의 어머니 김은경 씨(50)는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과 어울릴 줄 알게 돼 정말 기쁘다. 힘든 것을 참고 이기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하트’의 전병혁 송하승(23) 주정훈(24) 김상영(22) 씨는 19일 경기 의정부에서 열린 제7회 전국어울림마라톤대회에 출전해 각각 1, 2, 4, 5위에 입상했다.

○ 어려운 환경 속 운동선수들 후원도

‘하니’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운동하는 선수들을 돕는 프로그램이다. 만화영화 ‘달려라 하니’에서 항상 꿈을 잃지 않고 달리는 하니의 모습을 선수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만들었다.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6년간 매달 소정의 지원금 및 용품과 선물을 보내주고 응원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지금까지 혜택을 받은 선수가 총 12명. 현재 이미나를 비롯해 쌍둥이 형제 김관모 김근모(17·경북체고), 김연아(17·인천체고)가 후원을 받고 있다. 중장거리 유망주로 ‘하니’의 도움을 받은 신소망(20·익산시청)은 어엿한 실업선수로 성장했다. 신소망은 ‘하니 홍보대사’로 그동안 받은 도움에 보답하고 있다.

‘하니’는 1년에 4만 원인 회비와 ‘1회원 하니 1계좌(월 5000원) 갖기 운동’, 바자회 등을 통해 모은 기금을 사용한다. 페이스메이커를 하면 대회 참가비가 면제되는 것을 감안해 대신 1만 원씩을 후원금으로 내기도 한다. 매 대회 20∼30명이 참가하니 20만∼30만 원을 모으고 있다. 회원들의 적극적인 협찬도 이어진다. 지금까지 하니에 쓴 돈만 약 1억 원이다. ‘광마모’는 또 2002년부터 ‘독거노인에게 사랑과 희망을’이란 돕기 행사를 매년 하며 약 1억 원을 홀몸노인들에게 지원했다. 2004년부터는 소아암 환우 돕기 마라톤대회에 참여하며 대회 운영을 돕고 있다.

○ “돕는 즐거움, 이렇게 클 줄이야”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스캔하시면 지난 기사를 모두 볼 수 있습니다.

회원들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 2011년 코디를 지낸 김양수 씨(57)는 간암으로 큰 수술을 받은 뒤에도 봉사에 적극적이다. 김 씨는 “돕는 즐거움이 이렇게 큰 줄 몰랐다. 도움을 받은 아이들이 밝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회원들과 서로 격려하며 살기에 간암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광마모’는 매년 말 워크숍을 하며 잘한 것과 못한 것을 되돌아보고 좀 더 색다른 봉사를 찾는다. 순수성을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의 장이다.

개울이 모여 강이 되고 강이 바다가 되듯 ‘광마모’의 작은 봉사가 사회를 밝게 밝혀주고 있다. 서로 돕고 봉사하며 살자는 아주 단순한 모토를 내세운 ‘광마모’는 28일 서울시봉사상 단체 우수상을 받았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