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선 기자의 영화와 영원히]
‘그래비티’는 잘 만든 블록버스터 오락 영화지만 훌륭한 영화에는 못 미친다. 아래 사진은 리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 워너브러더스 제공
맞다, 닮았다. ‘그래비티’는 우주에서 펼쳐지는 ‘라이프 오브 파이’다. 망망대해 같은 우주에서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샌드라 불럭이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인다. ‘조난, 고난, 위기, 극복’의 단순한 이야기 얼개도 ‘라이프 오브 파이’와 판박이다.
두 영화의 매력은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래비티’는 와이어와 컴퓨터그래픽(CG)으로 진짜 우주에 온 듯한 착각을 하게 한다(알고 보면 시시하기 이를 데 없지만…).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며 낭만적으로 느꼈던 우주 공간은 조금만 삐딱하면 영원히 미아가 되는 공포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라이프 오브 파이’ 역시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배를 실감나게 그렸다. 바닷물이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신선함이 두 영화의 큰 매력이다.
리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가 좋은 점은 상업성과 예술성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아울렀다는 점이다. ‘전체 관람가’ 등급인 이 영화는 아이부터 노인까지 즐길 수 있는 요소를 고루 갖췄다. 아이들은 배 위에서 으르렁대는 호랑이를 보며 좋아하고, 어른들은 철학적 메시지를 챙겨 갈 수 있다. ‘아바타’ 이후 최고라는 3차원(3D) 효과와 아름다운 화면의 이면에는 인간의 야성과 이성에 대한 통찰이 담겼다. 호랑이는 원시 시대의 인류가 생존을 위해 가졌던 야성의 상징이다. 야성은 소년의 배가 뭍에 닿는 순간 홀연히 떠난다. 문명사회에서 지나친 야성은 폭력과 야만을 빚어낼 뿐이다. 메타포(상징)가 가득한 영화, 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영화. 생각거리를 주고, 또 보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다.
반면 ‘그래비티’에는 여운이 없다. 불럭이 보여준 분투가 끝나면 불안을 해소한 청량감만 든다. 녹차 같은 잔향이 없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이야기의 뼈대만을 발라낸 정갈한 연출 솜씨를 선보였다. 하지만 뼈대가 된 이야기에 우려먹을 ‘영양가’는 없다. 여주인공 캐릭터는 고난 앞에 박제화돼 있다. 아이를 잃은 상실감을 간직한 인물, 그게 전부다.
쿠아론 감독, 아직은 리안 감독에게 안 된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