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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일자리 리스타트]시간선택제 확대 ‘하르츠 개혁’ 10년… 실업률 절반으로 뚝

입력 | 2013-10-31 03:00:00

2부 해외 사례<1>독일




독일 베를린에 있는 건축자재 전문회사 ‘바우킹’에서 크리스티안 자우슈 사장(왼쪽)과 직원들이 야적장을 둘러보고 있다. 이 회사는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날씨와 계절에 따라 근무시간을 자율적으로 조절하는 시간선택제 근로 시스템을 도입해 고용안정과 경영효율화에 성공했다. 베를린=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 22일 낮 12시 반 독일 수도 베를린에 있는 건축 자재 전문회사 ‘바우킹’. 창고에서 지게차로 짐을 나르는 근로자가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회계업무를 담당하는 필라우 씨(50·여)는 책상을 정리한 후 PC 전원을 껐다. 이날 오전 7시 반에 출근한 그는 이렇게 매일 5시간의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한다. 필라우 씨는 23년 전 이 회사에 입사할 때 1주일에 40시간씩 일하는 전일제(全日制) 근무자였지만 2001년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시간선택제 근무로 바꿨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는 1주일에 10시간씩 근무하다 초등학교 입학 후부터는 주당 25시간으로 근무시간을 늘렸다. 》  

필라우 씨는 “시간선택제 근무는 결혼 후에도 경력을 이어갈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바우킹에서 일하는 170명의 직원 중에 40명이 시간선택제 근로자다. 이들은 전일제 근무자와 똑같은 시간당 임금과 사회보험 혜택을 받을 뿐 아니라 노조에 소속돼 법의 보호를 받는 정규직이다.

이 회사에선 주 40시간 일하는 직원들도 모두 자율적으로 시간을 선택해서 근무하고 있다. 1년 총 연봉과 총 근무시간은 일정하지만 여름에 초과근무하고 겨울에는 절반만 일하는 등 계절 등에 따라 자율적 시간 조정이 가능하다.

“예전엔 날씨, 계절에 따라 매출액이 큰 차이가 나는 건축업계의 특성상 4∼10월에 계약직을 대량으로 고용했다가 겨울시즌에 대량 해고하는 일이 반복됐어요. 2001년 노조와 경영진이 1년간 협상한 끝에 전 직원이 근무시간을 자율적으로 조절하도록 바꿨습니다. 이후 직원들의 신분도 안정되고, 신입사원 훈련비용도 절약할 수 있어 경영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이 회사 크리스티안 자우슈 사장의 설명이다.

○ 시간제 근로의 확대가 가져온 70%대의 고용률

독일은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2010년 유로존 재정위기에도 ‘나 홀로 호황’을 누려왔다. 특히 독일은 2004년 64.3%였던 고용률이 2008년에 70%를 넘어섰고, 지난해 말 76.7%로 계속 상승하고 있다. 유럽 전체가 높은 실업률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독일의 실업률은 올해 사상 최저치인 5.2%까지 하락했다.

실업률 하락에는 시간선택제 일자리 확대가 큰 역할을 했다. 독일은 유럽연합(EU) 내에서 네덜란드에 이어 시간제 고용비율이 두 번째로 높다. 특히 시간선택제 일자리는 기혼 여성의 취업률을 크게 높였다. 현재 독일의 15∼64세 여성 가운데 71.5%가 경제활동에 참가하고 있다. 53.1%인 한국의 여성 고용률과 크게 차이 난다.

독일에서 경직된 노동시장에 대한 개혁조치가 본격 시작된 것은 2003년. 통독 이후 10년간 경기침체에 빠져 ‘유럽의 환자’로 불리는 상황이 되자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이끄는 사회당(SPD) 정부는 노동시장과 사회보장제도를 전반적으로 개혁하는 ‘어젠다 2010’, 일명 ‘하르츠 개혁’을 추진했다. 이때 본격 논의된 것이 시간선택제 일자리, 파견근로 등에 대한 차별 금지와 복지 개선이었다.

2005년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기민당 정부로 정권이 교체된 뒤에도 개혁은 계속됐다. 독일은 하르츠 개혁을 통해 노동참여 인구를 크게 늘림으로써 1인당 국민소득도 2003년 2만3277달러에서 2008년 3만4400달러로 1만 달러 이상 높일 수 있었다.

유연해진 근무제도는 경제위기에서 더욱 큰 위력을 발휘했다. 카를 브렌케 독일경제연구소(DIW) 선임연구원은 “독일이 2008∼2010년 경제위기를 대량 해고 사태 없이 넘길 수 있었던 것은 경기 상황에 따라 근무시간을 조절하는 제도의 덕이 컸다”고 설명했다.

○ 여성과 청년, 고령층에 확대되는 시간선택제 일자리

독일의 시간제 근로자들은 교육 수준이나 전문직 종사자 비율이 높은 편이다. 최근 조사 결과 62%는 직업교육을 이수했거나, 대입자격시험 자격증을 갖고 있다. 또 18%는 박사학위가 있거나 마이스터 기술자 교육을 받았다. 또 시간선택제 근로자들의 43%는 고급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다.

화장품 마케팅업체 ‘코스노바’에 다니는 독일 교포 홍기현 씨(40)는 오전 8시 반 아이가 유치원에 간 후 집에서 e메일과 전화를 이용해 화장품 수출입에 대한 상담을 해준다. 1주일에 12시간 일하는 홍 씨의 한 달 수입은 총 1300유로(약 189만 원). 약 45%에 해당하는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제외하면 실제로 받는 돈은 700유로 정도. 홍 씨는 “전일제로 전환할 수도 있지만, 아이를 교육시킬 동안에는 시간제 재택근무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시간선택제 일자리 확대 이후 독일의 55세 이상 고령자 노동시장 참여 비율도 2000년 10.1%에서 2008년에는 12.8%로 늘었다. 프랑크푸르트에 살고 있는 워줄라 씨(76)는 65세 은퇴 후 종합병원 방사선과에서 환자차트 정리업무를 하고 있다. 그는 병원 측과 일주일에 10시간 일하고 한 달에 400유로를 버는 ‘미니잡’ 계약을 했다. 워줄라 씨는 “생계 부담은 없지만 사회활동을 해야 더 건강해진다고 믿는다”며 “85세까지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시간선택제 근로는 청년실업 해소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EU 통계청에 따르면 현재 유럽의 청년실업률은 24% 수준. 특히 그리스는 청년실업률이 60%를 넘고 스페인은 60%에 육박하는 데 비해 독일은 7.7%에 불과하다.  
▼ 월수입 65만원 이하 근로자 세금 면제 ▼

초단시간 근무 ‘미니잡’ 제도 운영… 가사도우미 등 700만명 혜택
일각선 “저임금 노동 확산” 비판


독일의 시간선택제 일자리는 시간당 임금과 사회보험, 노동법상에서 전일제(全日制) 일자리와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월 450유로(약 65만 원) 이하를 받는 초단시간 근로자들을 위한 ‘미니잡’ 제도는 예외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2003년 하르츠 개혁 당시 독일 정부는 청년층과 고령층의 부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식당 서빙, 가사도우미, 환자돌보미 등의 일자리에서 월 450유로 이하를 버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소득의 45% 수준인 세금 및 사회보험 부담을 면제해줬다. 이에 따라 미니잡은 선풍적 인기를 끌어 현재 700만 명 가량이 미니잡 형태로 고용돼 있다. 카를 브렌케 독일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미니잡 종사자는 55세 이상이 26%, 25세 미만이 19%로 여성, 청년, 노인층 등 고용취약계층의 취업 활성화에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다만 미니잡이 저임금, 저연금 노동을 확산한다는 비판도 일각에서 제기된다. 많은 사람들이 세금 면제 혜택을 받는 미니잡을 선호해 월 450유로 이상 받을 수 있는 일자리로 쉽게 옮겨가지 않기 때문이다.

보리스 벨터 베를린시정부 노동·여성담당 차관(45)은 한국의 시간제 일자리 확대 추진과 관련해 “기업이 단지 비용절감을 위해 비정규직 시간제 일자리를 늘리면 안 된다”며 “시간선택제 근로자에 대한 복지 혜택을 늘리는 대신 노동생산성을 높인다면 노사 양측이 이득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를 만들려면 노조와 기업, 정부가 함께 지속적으로 컨트롤하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팀장 박중현 소비자경제부 차장 sanjuck@donga.com
▽소비자경제부 김현진 김유영 기자
▽경제부 박재명 기자
▽사회부 이성호 김재영 기자
▽국제부 전승훈 파리 특파원, 박형준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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