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형만(1945∼)
구두 뒷굽이 닳아 그믐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수선집 주인이 뒷굽을 뜯어내며
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하는 말이
참 오래도 사시네요 하는 말로 들렸다가
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 하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
수선집 주인이 좌빨이네요 할까봐 겁났고
우빨이네요 할까봐 더 겁났다
구두 뒷굽을 새로 갈 때마다 나는
돌고 도는 지구의 모퉁이만 밟고 살아가는 게 아닌지
순수의 영혼이 한쪽으로만 쏠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사코 한쪽으로만 비스듬히 닳아 기울어가는
그 이유가 그지없이 궁금했다
수선공은 물건의 질병을 고쳐주는 전문의사다. 문짝에 ‘구두병원’이라고 적혀 있는 구두 수선집도 있다. 치과의사가 어떤 자리에서건 무의식중에 상대의 입속을 보게 되듯 구두 수선공 눈에는 구두가 우선 보일 테다. 구두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자부하는 베테랑도 있을 테다. 구두 굽이 고르게 닳는 사람은 드물다고 한다. 구두 굽이 닳은 형태는 구두 주인의 걸음걸이 습관, 삶의 자세를 드러낸다. 발을 질질 끌면서 걷는지, 왼쪽이나 오른쪽,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걷는지.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