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니’
고운기(1961∼ )
멀쩡한 제집 두고
때 되어도 밖에서 끼니를 때우는 일은
다반사(茶飯事)
도대체 집은 뭐하러 있는 거야?
아침은 얻어먹고 사냐는 질문도
굳이 마누라 타박할 문법(問法)은 아니지
차라리 못살았다는 옛날 생각이 나는 거야
새벽밥 해 먹고 들일 나가
날라 오는 새참이며 점심 바구니
끼니마다 집에서 만든 밥 먹던 생각
그것이 힘의 원천
저녁이면 큰 상 작은 상
각기 제몫의 상에 앉아
제 밥그릇 찾아먹는 것이 좋았다는 생각
무슨 벼슬한다고
이 식당 저 식당 돌아다니며
제 그릇 하나 찾아먹지 못하고 사노
먹는 게 아니라 때우면서
만주벌판 독립운동이라도 하나
멀쩡한 제집 두고
밖으로만 나다니면서. 먹방(먹는 방송)이 대세라더니 그 말을 확인했다. 건강검진으로 하룻밤 금식하면서 TV 앞에 앉아 있으니 ‘먹방 신드롬’이란 표현이 과장이 아니다. 드라마 교양 예능을 가리지 않고 먹는 게 주요 아이템이다. 세대 불문, 내외국인 불문, 남녀 불문, 먹는 모습도 개인기로 평가받는다. 인터넷 개인방송에선 맛있게 먹을수록 시청자와 수입이 느는 ‘먹방 BJ(Broadcasting Jockey)’도 등장했다. 자신이 먹는 모습을 중계하며 모니터 너머에서 혼자 밥 먹는 1인 가구들의 외로움을 달래는 역할이다. ‘생활의 달인’에 등장한 먹방 달인은 집에서 밥을 먹지만 메뉴는 죄다 배달 음식이었다. 아침은 마트음식, 점심 중국음식, 간식 치킨, 저녁 피자, 야식은 족발.
그 정도까진 아니라도 지금은 사먹는 밥이 예사로운 일이 됐다. 고운기 시인의 말대로 독립운동하는 비상상황도 아닌데 학원 가는 아이도 일하는 어른도 바쁘고, 해먹기 귀찮다는 이유로 집에서 만든 밥 먹기 힘든 세상이다. 주말에 가족이 모일 참이면 집밥 대신 레스토랑의 비싼 메뉴나 사람들로 북적대는 맛집 나들이를 선호한다. 살림살이 힘들 때 우리를 지켜준 것은 집밥의 ‘밥심’이었으나 이제 추억이자 그리움이 돼버렸다. 기운을 뜻하는 한자 ‘기(氣)’는 밥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시인은 생명 유지의 원초적 에너지를 넘어 삶의 에너지를 일상의 밥상에서 찾기를 바란다. 밥 속에 피어난 꽃을 그리는 화가 임영숙 씨도 그런 생각이다. 사발에 수북하게 담긴 밥알과 꽃이 어우러진 작품에 대해 평론가 박영택 씨는 “밥 먹는 일이 사는 일이고 생명을 피워내는 일이고 희망을 보듬는 일이라는 것”이라는 설명을 붙인다.
친구가 보내준 요리책을 요즘 재미나게 보고 있다. 제목은 ‘이렇게 맛있고 멋진 채식이라면’, 두툼한 인문서처럼 만들었는데 건강한 밥상은 지루할 것이란 편견을 무너뜨린다. 날씨가 쌀쌀하고 몸이 으슬으슬할 때 이 책이 추천하는 메뉴가 ‘버섯들깨탕’이다. 큼지막하게 썬 호박과 버섯을 달군 냄비에 기름 두르고 볶는다. 여기에 채소 우려낸 물을 넣고 끓이다 들깻가루를 넣는다. 찌개가 끓어오르면 국간장 소금으로 간하고 청양고추를 넣으면 된다.
오늘은 토요일, 특별한 찬 아니라도 식구들이 함께 준비해 함께 나누는 밥상이라면 그게 바로 위대한 밥상이리라. 몸과 마음의 공복을 채우는 부엌이 최고의 약국이란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