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마주치다/기태완 지음/320쪽·1만6500원·푸른지식일상서 볼 수 있는 꽃들의 이야기… 시-그림 곁들여 감칠맛 나게 전달
능소화(凌쑗花)는 글자 그대로 하늘을 능가할 정도로 높이 자라는 꽃이라는 뜻이다. 능소화는 스스로 높이 자라지 못하고 담장이나 키 큰 나무에 의지해 높이 뻗어 올라가며 눈부신 주황색을 발산한다. 푸른지식 제공
국어국문학 박사로 연세대 연구교수를 지낸 저자가 동아시아에서 전통적으로 자라는 꽃과 나무 26종을 소개했다. 각 꽃과 나무가 언제 동아시아 문화권에 등장했고 어떤 상징을 갖게 되었는지를 수많은 옛 문헌을 통해 살폈다. 그와 관련된 옛 시와 그림, 꽃 사진도 가득하다.
작약은 남녀 간에 사랑과 이별의 정표로 쓰였다. 고대 주나라 제후국의 하나였던 정나라에서는 3월 3일 삼짇날 미혼 청춘 남녀들이 봄놀이 행사를 즐기면서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작약을 주었다. 반면 진나라 문인 최표는 ‘고금주’에서 “장차 이별하려 할 때 서로 작약을 준다”고 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가 붉은 작약을 술에 취한 서시(춘추시대 말기 월나라의 미인)로 묘사한 시가 재미있다. “곱게 화장한 두 볼은 취기로 붉고/모두 서시의 옛날 모습을 끌어왔네/웃음으로 오나라를 망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다시 와서 또 누구를 괴롭히려는가”(이규보의 ‘홍작약’)
찔레꽃 향기는 오래전부터 술과 향수를 만드는 데 쓰일 정도로 청량하고 아름답다. 세상의 온갖 향에 대한 기록을 집대성한 명나라 문인 주가주의 책 ‘향승’에서는 찔레의 향을 운향(韻香), 그 품격을 일사(逸士)라고 했다. 운향은 운치 있는 향, 일사는 인품이 맑고 고상하며 세속의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않는 은자를 말하니 과연 절묘한 표현이다.
책은 사람들이 헷갈리기 쉬운 꽃에 대한 상식도 군데군데 전한다. 저자에 따르면 수국의 본래 한자 표기는 수국(水菊)이 아니라 수구화(繡毬花)이며 수를 놓은 둥근 공처럼 피는 꽃이라는 뜻이다. 또 근대 이전까지 동아시아에서 꽃의 여왕, 즉 화왕은 모란이었는데 서양 문화의 영향으로 지금은 그 자리를 장미에게 물려줬다고 한다. 오얏은 자두의 순우리말이며, 조선의 문인들은 등나무를 중요한 정원수로서 심고 가꾸었다.
꽃이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지만 인문학과 함께 감상하니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얽혀 더욱 우아하고 그윽해 보인다. 무미건조하게만 살아온 여인보다 기쁨과 슬픔을 모두 겪어 본 여인이 더욱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나팔꽃을 직녀의 눈물로 묘사한 작자 미상의 한 중국 시에도 그런 아름다움이 엿보인다. “견우가 송아지 끌고 오는 것을 오래 보며/직녀는 언덕 저쪽에서 천 번을 바라보네/그리움의 눈물이 천 송이 꽃으로 변하여/인간 세상으로 날아와 아름답게 피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