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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음향스태프 하나 돼, 같은 그림 상상하며 ‘소리 연기’

입력 | 2013-11-04 03:00:00

KBS1 라디오 드라마 ‘혁신의 승부사’ 녹음현장을 가다




라디오 드라마 ‘혁신의 승부사’에 출연하는 성우들. 외국인이 주인공인 이 드라마에서 성우들은 “말투에서 ‘버터 느낌’이 나도록 외화 더빙과 유사하게 억양과 강세를 과장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KBS 제공

《 “자, 시작합시다. 큐!” PD의 손짓과 동시에 ‘ON AIR’ 등에 빨간불이 켜졌다. 첫 번째 대화의 배경은 식당. 스튜디오 가운데 놓인 마이크 앞에서 성우가 연기하는 동안, 한쪽 구석에서는 음향효과 스태프 두 명이 발걸음 소리와 식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 사이 벽 쪽 의자에 앉아 있던 몇몇 성우는 자신의 차례를 앞두고 까치발을 한 채 마이크 주변으로 다가왔다. KBS1 라디오 ‘다큐멘터리 혁신의 승부사’(월∼금 오전 11시 40분) 녹음 현장은 한 편의 합주 공연 같았다. 지난달 28일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유명 기업의 탄생 과정을 극화해 소개하는 다큐드라마. ‘페이스북’ 이야기를 다룬 첫 화에 참여한 열댓 명의 성우와 제작진은 연출자인 박기완 PD의 지휘 아래 대본을 악보 삼아 조용하지만 분주하게 움직였다. 》

장면 단위로 촬영한 후 편집으로 엮는 TV 드라마와 달리, 라디오 드라마는 대본의 순서에 따라 진행하고 대부분의 음악이나 음향효과도 동시에 녹음한다. 주인공인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역의 성우 양석정 씨는 라디오 드라마에 대해 “녹음 시간 내내 집중해야 한다. 연기를 할 때 긴 호흡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TV 드라마보다는 연극에 가깝다”고 말했다.

라디오 드라마에서는 마이크와의 거리가 특히 중요하다. 연극 무대의 동선, TV 드라마의 카메라 구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양 씨는 “마이크 가까이 낸 소리는 카메라의 클로즈업, 멀리서 낸 소리는 풀 샷과 비슷한 효과를 준다”고 덧붙였다.

녹음 현장에는 다른 기술 스태프보다 음향효과 스태프의 수가 많다. ‘혁신의 승부사’에는 효과 스태프만 3명이다. 배경효과 담당자가 스튜디오 밖 부조정실에서 음향 자료를 선택해 내보내는 동안 다른 두 명의 스태프는 스튜디오 안에서 성우의 대사 호흡에 맞춰 생효과(foley sound)를 만들었다. 등장인물이 걷거나 문을 여닫는 소리부터 컴퓨터 자판을 치고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를 모두 현장에서 녹음했다.

효과 스태프 안익수 씨는 “인물의 캐릭터와 그가 처한 환경에 따라 걸음이나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도 다르다”며 “청취자가 소리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미세한 부분도 신경 써야 한다”고 전했다. 안 씨는 이날 녹음에서 저커버그의 걸음 소리를 낼 때는 슬리퍼를 신고 걷다가, 등장인물에 따라 운동화나 구두로 바꿔 신고 속도를 달리 하며 발소리 연기를 했다.

이 때문에 라디오 드라마에서는 출연자와 제작진이 머릿속에서 ‘같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 대본 지문에 ‘식당 소음’이라고 써 있다면 그 장소가 어떤 식당인지부터 소음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까지 녹음 전에 구체적으로 합의한다. 이날 17분짜리 방송 두 편의 녹음 시간은 1시간이 채 안 됐지만 연기 연습을 포함한 사전 준비에만 2시간 넘게 소요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듯 정성이 필요하고 제작비도 일반 프로그램의 2∼3배에 달하는 탓에 라디오 드라마는 역설적으로 방송사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 라디오 채널 8개를 가진 KBS에는 라디오 드라마가 ‘혁신의 승부사’를 포함해 6개, MBC에는 ‘배한성의 고전 열전’ 하나뿐이고, SBS에는 아예 없다. 박 PD는 “최근에는 정극보다는 정보성이나 오락성을 강화한 퓨전 형식이 강세”라며 “매체 환경에 따라 라디오 드라마도 변화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