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가까이 결핵퇴치 매진한 김성진 대한결핵협회 고문
김성진 대한결핵협회 고문은 1956년 중앙결핵원에 투신한 이래 반세기 넘게 한국의 결핵 퇴치를 위해 앞장서 왔다. 대한결핵협회 제공
김 고문은 평안북도 강서군에서 태어나 1949년 평양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어려서부터 무척 따랐던 삼촌이 40대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등졌다. 삼촌의 아들도 같은 병으로 삼촌의 뒤를 따랐다. 김 고문은 “결핵으로 일가족이 풍비박산 나는 모습을 보면서 반드시 의사가 되어 이 땅에서 결핵을 몰아내리라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가 결핵퇴치사업에 본격적으로 투신한 건 1956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결핵원의 실험부장이 되면서부터다. 그때는 모든 게 부족했다. 감염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흉부 X레이조차 찾기 어려웠다.
김 고문은 지금까지 한국의 결핵퇴치운동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 1965년 처음 실시된 ‘결핵실태조사’에서 전체 국민의 5.1%나 되던 결핵환자 비율은 현재 0.1%대까지 떨어졌다. 사망률도 함께 감소했다. 걸리면 무조건 죽는다는 이유로 결핵을 폐가망신 병이나 망국 병으로 부르던 시기는 지났다. 그는 “한국의 결핵퇴치사업은 전 세계 감염병 학계에서도 질병퇴치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손꼽힌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고문은 대한결핵협회의 창립 60주년(6일)을 앞두고 “여전히 안심하긴 이르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서울의 A고교와 대전 KAIST 학생들에게서 결핵이 단체로 발병한 일을 언급했다.
실제로 한국의 결핵 감염률은 아직까지 세계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수난을 겪으며 결핵환자가 급격히 늘어난 여파가 여전히 남아있어서다. 그는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민관이 함께 결핵균 박멸에 나서야 한다. 선진국 수준이 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강조했다.
생애 마지막으로 김 고문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은 고향인 북한 땅에 결핵 전문 의료기관을 세우는 일이다. 결핵 관련 대북지원은 1999년 시작됐지만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잠정적으로 중단된 상태다. 김 고문은 “정치상황과 무관하게 당장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기 위한 인도적 의료지원은 계속되어야 한다. 결핵으로 고통받는 북녘의 동포를 구하고 의료진을 교육하는 병원이 설립되는 모습을 생전에 꼭 보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