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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칼럼]代讀총리 大수비 정부

입력 | 2013-11-04 03:00:00

“대통령은 세일즈외교 하는데…” 행정부의 수반을 대신해 입법부의 협조 부탁한 총리
“정치를 없앨 수는 없다”던 대통령후보 시절 쇄신 약속… 정책세일즈 정치는 왜 못하나




김순덕 논설위원

“엄마는 시장에 돈 벌러 간다. 맏이가 책임지고 동생들 숙제 잘 시키고 있어!”

박근혜 대통령의 유럽 순방 전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한 정홍원 총리는 엄마 말 잘 듣는 맏아들 같았다. “지금 대통령께서도…우리 기업들을 돕기 위해 직접 세일즈 외교로 세계를 누비고 계십니다…무엇보다 정치권에서 힘을 모아주셔야….”

대통령의 의중이 실린 A4용지 넉 장의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총리는 9분간 읽고는 퇴장했다. 책임총리는커녕 “대통령이 직접 하는 게 낫다”고 말도 못하는 대독(代讀)총리임을 입증하는 듯했다.

사흘 뒤 대통령은 “국무총리께서 강조했듯이…”라며 정국 운영 방침을 다시 밝혔다. 기자들이 ‘대수비’라고 줄여 부르는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다. 장관들이 국정을 심의하는 국무회의와 달리 청와대 내부회의는 윗분의 뜻을 받드는 비서들이 모인다. 대통령은 “민생 법안 등은 해당 기관 수장들이 직접 설득하는 노력을 강화해주시기 바란다”고 말해 수석들에게 장관들을 채근하도록 지시했다.

물론 비서실이라도 나서 정국이 술술 풀린다면 문제 삼을 필요는 없을 터다. 하지만 대통령이 8월 김기춘 비서실장을 임명하며 “비서실이 모든 것을 풀어야 나라 전체도 조화롭게 풀릴 것”이라고 격려한 뒤 비서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현안들을 보면, 전투에서 이겼을지 몰라도 전쟁에선 부수적 피해가 무수하다.

대선 때 대통령을 찍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청와대가 무섭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해당 기관에선 수장 아닌 청와대만 쳐다볼 따름이다. 오죽하면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을 지낸 ‘까칠한 보수’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가 “성공하는 대통령의 경우 참모가 내각에 군림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지적했겠는가.

대통령은 정쟁에 휘말리는 대신, 정치와 거리를 둔 채 민생과 외교에 전념해야 한다고 믿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1년 전 11월 6일 대선후보 때 “정치가 실망스럽다 해도 정치를 없앨 수는 없다”던 정치쇄신안은 내놓지 말았어야 했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염증이 극에 달해 새 정치, 아니 반(反)정치에 대한 욕구가 들끓던 무렵이었다. 대통령은 정치쇄신의 목표가 정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복원하는 것이라며 “민주적 국정 운영을 위하여 사문화해 있는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 장관의 산하기관장 인사권을 보장하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국민대통합의 탕평인사로 ‘편중인사’란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할 것”이라는 대목은 차라리 ‘사초 실종’처럼 사라져 버렸으면 속이라도 편할 판이다.

“대통령은 국회를 존중하고 여당은 물론 야당들과 소통해야 한다”라는 스스로의 발언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대통령의 정치다. 잭 웰치 제너럴일렉트릭(GE) 전 회장은 지난달 꽉 막힌 미국 정치풍토를 개탄하며 “리더는 수다 떨지 않으면 진다(Schmooze or Lose)”라고 했다. 의견이 다르고 불신이 팽배한 상대와도 자꾸 만나야만 타협의 여지도 생긴다는 것이다.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은 입법부의 협조가 필요한 사안이면 내 일처럼 나설 필요가 있다. 정치는 ‘형님’에게 맡겼다가 더 큰 짐을 지게 된 지난 정부를 뻔히 보고서도 왜 대통령은 그 중요한 일을 비서실에 넘기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북한 김정은 체제 및 종북 세력과의 세(勢)싸움을 통해 국민의 이념적 지형을 보수화함으로써 50% 이상 지지율을 굳힌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쇄신 약속은 지키지 않으면서 ‘정치권’만 탓하는 모습은 보기 딱하다. 이 때문에 권위주의로 돌아간다는 말이 나오는데도 대통령은 야당의 정치적 공세로만 받아들이고 있다.

프랑스의 르몽드지는 석 달 전 ‘자유, 평등, 우울(Libert´e, ´egalit´e, morosit´e)’이라는 제목으로 3개 면에 걸쳐 국가적 불안을 다뤘다. 치열한 경쟁을 통과해도 취업하기 힘든 교육과 함께 늙고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 과거(의 영광)에 매달린 대통령들이 원인으로 지적됐다. 그 뒤에도 지지부진한 정국 탓에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최근 지지율은 역대 최저인 26%다.

두 달 전만 해도 베트남에서 한복 패션쇼를 펼친 대통령을 아름답고 자랑스럽게 여겼던 사람들의 마음이 식어가고 있다. 문화융성 외교도 좋고, 창조경제 세일즈 외교도 좋다. 이제는 외국에서 보인 밝은 표정으로 정책 세일즈를 하는 모습을 국내에서도 보고 싶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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