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미 여성동아 팀장
工은 신을 부르는 주술도구이고 口는 축문을 봉납하는 그릇이다. 즉 왼손에는 주술도구를, 오른손에는 축문 그릇을 들라는 의례 용어인 것이다. 제사장이 사당 문(門) 앞에 축문 그릇을 놓고 신에게 아뢰는 것이 ‘물을 문(問)’이오, 신의 응답을 듣고자 애쓰는 것이 ‘숨을 암(闇)’이다. 시라카와 선생은 한자란 의례상의 실천을 자형으로 영상화해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한다.(‘한자 백 가지 이야기’)
그렇다면 인간으로 하여금 문자를 만들게 한 원동력이자 그토록 애타게 듣고자 하는 신의 응답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앞날의 길흉화복일 것이다. 반대로 앞날을 미리 알아버리면 인간은 신을 찾을 이유가 없어진다.
“모년에 시험을 치르면 몇 등을 하고, 모년에는 관리가 되고, 모년에는 승진을 하며, 이후 재임 3년 반이 되면 곧바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53세 8월 14일 축시에 안방에서 생을 마칠 것이나 애석하게도 자식은 없네.”
이 말을 기록해 두고 나중에 결과와 맞춰 보니 등수까지 틀림없자, 요범은 정해진 운명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구하려는 마음이 없어졌다. 사실상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선방에 들어간 요범과 마주한 운곡 선사는 “그대가 호걸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범부(凡夫)에 불과하다”고 꾸짖으며 “운명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고, 복은 자신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공덕과 과실을 기록하는 공책을 준 뒤 매일 선행을 베풀면 숫자를 적고, 반대로 악행을 하면 기록된 숫자를 지워 나가는 식으로 3000가지 선행을 하도록 했다.
이후 요범은 예부 과거 시험에서 3등을 하리라는 공 노인의 예측과 달리 1등을 했고, 아들을 얻었으며, 69세에 인생 지침서인 ‘요범사훈’을 써 아들에게 남기고, 73세에 세상을 떠났다. ‘요범사훈’ 1편 ‘입명지학(立命之學·운명을 세우는 공부)’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천하에는 총명하고 뛰어난 인물이 적지 않으나 그들이 덕을 더욱 닦지 못하고 학업을 더욱 넓히지 못하는 까닭은 단지 ‘인순(因循)’ 두 글자가 그들의 일생을 지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호암 역 ‘요범사훈’) 인순은 낡은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을 가리킨다. 운명에 매달리는 것이 곧 인순에 얽매여 일생을 지체하는 어리석음이다.
김현미 여성동아 팀장 khmzi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