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나선경제무역지대 내 한 호텔 카지노의 내부. 중국인들에게만 출입이 허용되나 북한의 고위층들도 조선족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수시로 드나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DB
지난달 23일 노동신문은 전국에 14개 중앙급 경제개발구(특구)와 13개의 지방급 경제개발구를 지정했다고 보도했다. 같은 달 16일 북한은 국가경제개발총국을 국가경제개발위원회로 승격시켰다. 이 위원회는 노동당 행정부의 지시를 받는다. 10월 초에는 김정은이 참석하고 장성택이 주도하는 전국적인 경제 간부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이에 앞서 9월 말에는 새로운 시장경제 구상을 전국 경제 간부들에게 학습시키는 강연회가 평양에서 열렸다. 한국 언론들의 북한 보도도 온통 경제개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 경제개혁의 사령탑을 장성택이 틀어쥐고 있다.
요즘 북한에서 장성택의 말은 김정은 지시 못지않게 힘이 있다. 한국 언론은 김정은 현지시찰 수행 횟수를 집계해 장성택이 신임에서 멀어졌다느니 가까워졌다느니 따지고, 공식서열을 매기기 좋아하지만 왕조사회인 북한의 권력서열에서 로열패밀리는 예외다. 김정은 고모인 김경희가 현지시찰에 한 번도 따라가지 않았다고 서열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서열 2위였던 이영호 북한군 총참모장은 지난해 하루아침에 숙청됐다. 장성택은 김 씨는 아니지만 김정은의 고모부로 로열패밀리의 일원이다.
이미 나선에서는 몇 달 전부터 중앙의 지시로 철저한 봉쇄를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됐다. 나선을 에워싸고 있는 철조망은 새롭게 보강되고 출입통제도 더 엄격해졌다. 1991년 나선이 최초의 경제특구로 지정될 때 설치된 철조망은 동독에서 수입해 온 것이었다. 동서독 분단의 잔재가 북한에서 자국민 봉쇄용이란 새 용도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중국과의 교류가 비교적 활발한 나선으로 몰래 들어가 물품을 싸게 구입하려는 주민들의 20년 넘게 이어진 시도는 철조망 곳곳에 구멍을 만들었다. 북한은 경제개혁에 착수한 뒤 첫 실질적 조치로 바로 이 구멍 뚫린 ‘보이지 않는 철조망’부터 새롭게 보강하고 있는 것이다. 장성택이 둘러본 나선의 현실은 어떨까.
비록 허울 좋은 경제특구이긴 하지만 그 덕분에 그렇지 않은 다른 지역보다는 생활수준이 확연하게 높다. 평양을 능가하거나 최소한 비슷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최근 들어 중국의 적극적인 투자로 나선의 도로와 철도 등 주요 인프라는 크게 개선됐고 전기 사정도 평양보다 낫다. 4, 5년 전엔 중국 투자자가 집을 지어 현지에서 제일 부자인 북한 세관원들에게 1만∼2만 달러에 분양하기도 했다. 거리를 오가는 승용차의 80% 이상은 중국 번호판을 단 승용차들이다. 식당에선 북한 요리는 구경할 수 없고 전부 중국 요리만 판다. 예외로 단 한 곳의 러시아 식당이 있다.
나선 장마당 입구에서 두부 한 모를 중국돈 1위안에 파는 장사꾼 할머니는 오늘날 나선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선 일부 값싼 채소를 살 때를 제외하곤 북한 화폐가 사용되지 않는다. 거의 모든 거래가 위안화로 이뤄진다. 중국 경제권에 가장 깊이 빨려 들어간 것이 오늘날 나선이 잘사는 비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답을 ‘더욱 철저한 봉쇄’에서 찾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나선은 전국에서 비밀경찰망이 가장 조밀한 곳이다. 인구가 20만 명에 불과하지만 나선의 보위부는 도(道)급 보위부 편제를 갖추고 있다. 외국인이 방문하면 개인별로 감시원이 따라붙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선의 변화는 비밀경찰도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시장경제의 힘이다. 장성택이 아무리 노회하다 한들 시장경제는 그에게도 생소한 것이다.
지금쯤 평양으로 돌아온 장성택은 기자의 이 칼럼을 보고 어떻게 며칠 전 자신이 시찰하고 지시한 내용이 한국 언론에 벌써 나느냐며 “나선은 정말 썩었다”고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특구 1번지 나선의 현실은 앞으로 북한이 외자 유치를 통해 만들려는 27개 경제특구의 먼저 온 미래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앞에선 당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하고 뒤에선 회사의 월급봉투와 보너스에 정신을 쏟는 구조는 결코 오래갈 수 없다. 설령 주민 대다수가 보위원이라 할지라도 이 거대한 흐름을 절대 막을 수 없다. 보위원도, 당 간부도 자신들의 두뇌와 이기심까지 노동당에 맡기고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