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법원 잇단 판결에 이례적 성명
“日 언제쯤 사과할까” 6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제1099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가 열렸다. 위안부 할머니와 집회에 참석한 학생들이 일본의 공식 사죄를 촉구하고 있다. 이날 일본 재계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일제강점기 시절 피해를 더이상 보상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이 성명은 “1965년 일한청구권협정에 의해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하고 또한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기초로 해서 지금까지 일한 경제 관계는 순조롭게 발전해 왔다”고 주장했다. 이 성명은 이어 “한반도 출신 구(舊) 민간인 징용공 등에 관한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 청구권 문제는 앞으로의 대한 투자나 비즈니스 전개를 하는 데 장애가 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이 성명은 특히 “일한 양국 간 무역투자 관계가 냉각되는 등 양호한 일한 경제 관계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어 깊이 우려하고 있다”며 “일본 측 경제계도 한국 측 경제계를 통해 이해를 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 주요 경제 단체가 외교 사안에 성명을 발표한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라는 게 한일 외교가의 평가다. 그만큼 강제 징용자 문제가 한일 관계의 뇌관이 되고 있다는 의미다. 일본의 한 전직 외교관은 “한국 사법부가 신일철주금(옛 일본제철)이나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에 대해 강제 집행하는 장면이 일본 TV에 비쳐지면 한일 관계는 중대한 국면에 접어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은 일본의 제3의 무역 상대국이며, 일본은 한국의 제2 무역상대국이다.
하지만 일본 일각에서는 이번 문제가 해결되면 한일 관계 개선의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본 시민단체인 ‘강제 동원 진상 규명 네트워크’의 고바야시 히사토모(小林久公) 사무국장은 “양국 정부 모두 일한 기본조약으로 외교적 보호권은 행사할 수 없지만 개인청구권 자체가 소멸된 것은 아니라는 견해에 차이가 없다”며 “50년, 100년 후의 미래를 생각할 때 일본 정부가 리더십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인환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 위원장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상 당시 한국 정부가 피해자 규모 자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피해자들의 동의를 받는 절차도 없었기 때문에 개인에게까지 협정의 효력이 미친다고 말할 수 없다”며 “일본도 독일처럼 정부와 기업이 펀드를 조성해 피해자 개개인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교부는 민간 단체의 발표에 대응하는 것은 격(格)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라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 다만 한 정부 관계자는 “재산 및 청구권 문제가 최종 해결된 것을 기초로 지금까지 한일 경제 관계가 발전해 왔다는 주장은 논리적 비약”이라며 “일본 경제단체의 이런 행동이 경제 관계 발전을 위축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날 재계 발표에 앞서 일본 정부는 여러 차례 외교채널로 강제 징용 배상 판결이 잇따르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한국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이 나면 이를 한일협정에 따른 중재위원회에 회부하거나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두 가지 방안은 한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문제는 일본이 한일투자협정 등을 근거로 국제 분쟁으로 몰고 가는 경우다. 이럴 경우 외국인 투자 위축 등 파장이 발생할 수 있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조숭호·백연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