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여성시대]2부 전문직<9>중소기업인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2000년 에어비타를 세우기 전 이 씨의 직업은 주부였다. ‘쓰기 편한 소형 공기청정기를 만들어 보자’라는 생각으로 사업에 뛰어들어 신기술도 개발했지만 남성 위주의 시장에서 여자 혼자 사업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이 대표는 더 독해지기로 했다. 남자 사장들의 넉살과 주량 대신 기술력과 꼼꼼함으로 승부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남자처럼 일해 보려고 했지만 타고난 자기 색깔을 버릴 수가 있나요. 생판 모르는 길을 저만의 방법으로 뚜벅뚜벅 걸어갔어요.”
맨땅에서 새 사업을 일궈내는 창업은 남녀에 관계없이 힘든 일이다. 특히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벤처업계에서 여성 기업인들은 보이지 않는 벽과 싸우며 묵묵히 자신들의 방법으로 새로운 경영사를 써가고 있다.
통계청 통계에 따르면 전체 신설 법인 수 중 여성이 설립한 사업체의 수는 2008년 9812개(19.2%)에서 지난해 1만6742개(22.5%)로 늘었다. 개수는 늘었지만 모든 기업이 순탄하게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여성기업인협회 조사에 따르면 2011년 여성이 경영하는 기업 중 32.7%는 창업 후 한 번도 손익분기점을 넘어서지 못했다. 조직 형태도 개인사업자가 96.8%로 (법인사업자 3.1%) 영세한 1인 사업장이 대부분이었다. 사업 아이템도 쇼핑몰, 요식업 등 경쟁이 치열하고 영세한 유통, 서비스업에 국한돼 있는 실정이다.
대기업, 정부조직 등 여러 조직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능력을 인정받으며 일하고 있지만 여성 기업인들은 남성 기업에 비해서 많은 불리함을 겪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성 기업인들은 여성이 신생 기업을 운영하는 어려움을 ‘유리 천장’이 아니라 ‘강철 천장’에 비유했다. 여성이 사업을 경영하다 보면 깨지지 않는 한계를 느낄 때가 많다는 의미였다.
수도권에서 유아용품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여성 사업가 유모 씨(38)는 최근 겪은 대출 과정의 ‘굴욕’을 떠올리며 하소연했다. “은행에서 대출을 거절당할 때마다 그저 경기가 나빠서 모든 중소기업이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금융기관에서 남편 직업을 묻고 보증을 요구할 때는 ‘남자가 운영하는 기업도 이런 대접을 받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10여 년 전 미용기기 제조업에 뛰어든 배모 씨(44)는 직장 생활을 접고 창업을 하자마자 인맥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에 고등학교와 대학 동창회에 처음으로 나갔다. 배 씨는 “동창회에 나온 친구들 중 직장생활을 하는 여자는 나밖에 없더라”고 말했다. “남자 동기들은 초중고교뿐 아니라 군대, 대학, 동호회 등 여러 인맥을 이어나가고 있어요. 동창회에 가보니 일하던 여자 동기들도 대부분 아이를 낳고 전업주부가 되는 경우가 많아 동창회에서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도 쉽지는 않았어요.”
특히 ‘술’이 없으면 돈독한 관계를 맺기 힘든 한국의 비즈니스 문화 역시 여성 기업인들에게는 큰 장벽이다. 사업 파트너들과 힘들게 술자리를 가져도 동등한 파트너로 대접받기보다는 술집 도우미 취급을 받는 일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여러 어려움 중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점은 사업 파트너로 대접받기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모욕적인 가십에 시달리거나 사업 아이템의 가치가 무시당할 때였다. 남성 부하직원과 단둘이 지방 출장을 갔을 때 불륜으로 의심을 받거나 특허까지 낸 사업 아이템을 가져가고도 거래처 공장 앞에서 거래하지 않겠다며 거래처 남자 사장에게 문전박대당한 일을 토로하는 여성 사업가도 있었다.
○ 투명하고 유연한 조직이 경쟁력
“타버린 제품을 아쉬워하며 울거나 절망하는 대신 머리가 빠르게 움직였어요. 사고를 당하고 사기를 당한 것도 여럿이었지만 그 경험이 오히려 냉정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어요.”
이길순 대표는 경험을 어느 정도 쌓은 여성 기업인은 오히려 남성 기업인보다 더 대범하다고 설명했다. 남성 기업인보다 더 좌절이 큰 만큼 오히려 경험이 쌓이면 더 합리적으로 보고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여성 기업인이 중심이 된 유연한 기업 문화는 조직원들을 편하고 활기차게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조직 내외부에서 여성이 운영하는 기업은 조직원들끼리 소통을 잘하고 기업이 투명하게 경영된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도 한다. ‘이음소시어스’ 박희은 대표는 “사업 초기에는 내부 구성원들끼리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도 “여성이 리더로 있으면 성별이 다른 구성원들 가운데 조율하기 껄끄러운 부분들도 트러블 없이 부드럽게 해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구성원을 선발할 때도 개개인의 능력뿐 아니라 모였을 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인지 고려하는 것도 여성이 경영하는 기업의 특징이다.
때로는 여성이 진두지휘하는 기업이라 회사 경영이 안정적이고 투명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기도 한다. 유아용품 제조업체 유 대표는 “수출시장을 알아보러 유럽에 갔을 때 상대 회사에서 여성 기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호적인 시선과 신뢰감을 느꼈다”며 “회사 경영이나 투자 방향에 대해서 설명할 때 남자 기업인보다 신뢰받는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고 회상했다.
성장 과정에서 성차별을 상대적으로 덜 느끼며 ‘알파걸’로 성장한 20대 젊은 여성 창업자들은 이러한 여성 기업인으로서의 콤플렉스나 좌절이 덜한 편이다. 프린트 광고업체 애드투페이퍼는 대학생들이 학내에서 프린터를 이용할 때 사용하는 종이 하단에 광고를 삽입하고 프린트를 무료로 할 수 있도록 광고 네트워크 역할을 하는 회사다. 이 회사 대표는 26세 여성인 전해나 씨다. 전 대표는 광고주들과 만날 때나 회사를 알릴 때 직접 뛰며 여러 사람을 만나지만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여성이라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저희 세대는 권위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하지 않은데 나이가 많은 분들 중에는 가끔 여자가 운영하고 이끄는 조직을 가볍게 보시는 분들도 계시기는 해요. 여자가 말하는 ‘숫자’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벽이 느껴지긴 하지만 사업 아이템에 경쟁력이 있으면 성별은 결국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