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진 전 법무부 장관 국민대 명예교수
법조인들의 생리나 언어습관을 얼마쯤 알기 때문일까, 필자는 자연스럽게 그 답변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서 우연히 두 분이 공통적으로 쓴 법조인들 간의 ‘교류’란 과연 어떤 의미일 것인가에 관하여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물론 이런 경우 교제나 교유(交遊) 또는 단순히 인사 삼아 찾아뵙는다는 뜻에도 미치지 않는, 그 교류라는 중립적 단어가 법조인 사회의 한 특징을 역(逆)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도 동시에 하게 된다.
교류의 사전적 의미는 서로 주고받거나 뒤섞이어 흐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법관이나 검사는 원래 법과 정의 관념에 따라 독립적으로 업무 수행을 하는 자리이므로 직무상의 일과 무관하게 서로 교류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문 사례가 될 수밖에 없다. 변호사들의 경우에도 공직윤리법이나 변호사법에 따른 제한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전관예우에 대한 사회적 비난도 크므로 변호사들끼리라면 몰라도 판검사들과의 교류는 생각만큼 수월하거나 빈번하다고 볼 수가 없다. 또 법조인 사이의 교류라고 하더라도 취미나 봉사 또는 종교활동 등을 통한 의례적 접촉이거나 교수들이 주축인 학회 활동의 범주에 속하는 무색적인 것이라면 별다른 논란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업무상 거치게 되는 협의나 결재의 과정을 교류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그러나 법조인의 세계라고 하더라도 따뜻한 인품이나 공통된 인문학적 관심 등으로 특별한 이해관계 없이 담연(淡然)한 마음을 서로 열어놓는 인간관계도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다. 필자의 경우에도 검사의 직을 벗어던졌을 때 차분한 위로의 편지를 보내준 판사나, 새로 도입된 제도의 안착을 위하여 자주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던 검사와 교수, 대학으로 옮겨 간 직후 헬렌 니어링이 쓴 책을 한번 읽어보라며 보내준 법조 후배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가지고 있다. 행정부에 몸담게 된 전직 법관의 초청으로 몇몇이 아무런 구애됨이 없이 만나 청담(淸談)을 나눈 일도 인상에 남는다. 물론 이런 교류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아무런 대가관계가 없으며 지연이나 학연과는 처음부터 무관할 수밖에 없다. 법치주의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밑바탕에 있음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비록 이런 맑은 교류, 착한 교류라고 할지라도 법조 관련 종사자의 경우라면 당연히 금기로 여기거나 백안시해야 할까.
법조인의 세계에서도 교류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삶의 방식이나 철학이 달라 굳이 교류를 이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교류를 해도 교류하는 것같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류가 없으면서도 늘 마음으로는 교류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비록 법조인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세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청연(淸緣)을 바탕으로 한 ‘착한 교류’라면 아직 우리 주변에 더 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정성진 전 법무부 장관 국민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