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축은 죽음의 처방전인가데이비드 스터클러, 산제이 바수 지음·안세민 옮김/314쪽·2만 원/까치불황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 분석
하지만 책장을 넘기며 생각이 달라졌다. 이 책이 얼마나 날카롭고 매서우며 짜릿한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살짝 투덜거리며 이 책을 맡았는데, 읽고 나서는 책의 향기 팀장한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명하다. 세계 어디에서건 정부의 긴축은 죽음에 이르는 처방이라는 주장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학자인 스터클러와 미국 스탠퍼드대 예방연구센터 교수인 바수는 공중보건 전문가들. 불황이 인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해 봤더니, 경기가 좋고 나쁜 건 그다지 문제가 아니었단다. 핵심은 정부 재정을 탄탄하게 만든답시고 긴축정책을 펴며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축소한 것이 국민의 건강을 해쳤다는 얘기다. 게다가 이런 방식은 경기 부양에도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고 지적한다.
결과는 알고 있는 대로다. 태국은 자살률이 60% 증가했으며, 유아 사망률이나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 감염률도 수직 상승했다. IMF 요구대로 공중보건 지출을 해마다 9∼15%씩 줄여 나간 결과다. 한국은 빈곤율이 1997년 11%에서 이듬해 23%로 치솟았다. 인도네시아도 마찬가지다.
반면 보건 및 빈곤구제 지출을 늘린 말레이시아는 모든 건강 지표가 좋아졌으며, 경제 회복도 가장 빨리 이뤄 냈다. 다행히 한국은 극단적 긴축은 피하며 이후 회복세를 보였지만, 태국과 인도네시아는 지금도 위기를 벗어났다고 말하기 힘들다. IMF는 당시의 선택이 잘못됐음을 공식 사과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는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다. 실제로 20세기 초반 미국이 대공황을 겪었을 당시, 정부의 뉴딜정책을 받아들여 돈을 풀었던 주와 그러지 않았던 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을 손에 쥐게 된다. 이제는 짐작 가능하겠지만, 긴축을 지지했던 주는 국민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다.
소련이 붕괴했을 때도 똑같은 일이 되풀이됐다. 제대로 된 사회안전망을 갖추지 않고 급속한 자본주의를 시도한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은 모두 장기 경제 침체와 함께 수많은 생명을 잃었다. 하지만 점진적인 개혁을 표방하고 기존 복지정책을 유지했던 벨라루스는 충격을 최소화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2008∼2009년 엇비슷하게 경제 위기에 직면한 아이슬란드와 그리스를 보라. 아이슬란드는 현재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으나, 그리스는 갈수록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 차이는 긴축정책을 폈는가, 아닌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목소리는 현재 정부 정책이나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판에서는 주류의 시각이 아니다. 그리스는 물론이고 세계 최고의 국민의료시스템을 갖췄던 영국조차 최근 긴축을 내세우며 비용 절감을 외치고 있다. 눈앞에 위기가 닥쳤으니 허리띠를 졸라매려는 건 어쩌면 본능적인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본능이 수많은 생명을 갉아먹고 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