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주방장 에세이
연탄을 그득하게 광에 재어놓고 김칫독이 즐비하면 정말 등 따습고 배부르게 겨울을 날 것 같은 시대였다. 가파른 언덕길에 연탄 실은 리어카가 바삐 돌아다니고, 하릴없는 동네 소년들은 리어카 뒤밀이로 십원짜리 동전을 얻어 쓰기도 했다. 연탄은 툭 하면 품귀여서 연탄집 아저씨는 날씨만 쌀쌀해지면 배짱이 늘어 말투가 퉁명스러워지던 때이기도 했다. 연탄은 보통 2인 1조로 배달을 다녔는데, 한 사람이 연탄을 대여섯 장 들고 휙 던지면 광 앞에 서 있는 아저씨가 낼름 받아서 차곡차곡 쌓는 게 묘기 같았다. 요새 생활의 달인인가 하는 프로가 그때도 있었으면 틀림없이 출연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어떤 배달꾼은 자그마치 연탄을 열 장쯤 쟁여서 던지고 받았다. 놀라운 솜씨였다. 그 아저씨들의 우악스러운 팔뚝 근육과 얼굴에 묻힌 검댕이 그렇게도 멋있을 수 없었다. 연탄은 겨울의 검은 황제였다.
김장이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뭐랄까, 맛있는 음식을 저장해두고 겨우내 먹는다는 의미보다 생존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더 강한 행사였다. 김장할 돈이 없어서 남의 집 담을 넘는다는 신문기사가 흔했고, 김장의 포기 수로 가계의 규모를 자랑하던 때였다. 요새 같으면 안 먹고 말 일이겠지만, 당시엔 김장 못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멕시코와 인도산을 수입했다는 기억이 지금도 선명한데 나라에서 나눠준 배급권으로 산 고추의 모양이 정말 특이했다. 깡총하고 통통한 게 우리 고추와 너무 달랐던 것이다. 모양만 그런 게 아니라 맛이 정말 이상했다.
좀 있는 집은 국산과 반씩 섞고, 가난한 집은 온전히 수입 고추를 썼는데 그해 김장을 완전히 망쳤다. 김치가 쓰고 색깔도 나쁘며, 도저히 먹을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추가 단지 매운맛 효과만 있는 게 아니라 김치 발효와 저장에 아주 큰 역할을 한다는 걸 그때는 몰랐거나 적어도 무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농촌이 아니더라도 김장만큼은 품앗이의 전통이 도시에도 그대로 살아 있었다. 백 포기, 이백 포기가 보통이어서 일이 고되었고 쓰이는 도구와 장비를 여럿이 모아서 쓸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었다. 채칼도 그렇고, 배추를 절일 커다란 함지박도 여러 집이 돌려가며 써야 했다.
김장은 무엇보다 냄새였다. 마당 한 켠에서 석유풍로를 켜고 멸치젓을 달였다. 큰 함지박과 대나무 소쿠리, 채반에 되는대로 담은 절인 배추에서는 짭짤한 소금과 풋것 내가 났다. 버무릴 양념을 만들면 발간 고춧가루에서 매콤하고 달큼한 향이 났다. 마당에서 김장하던 엄마가 오후 늦게 갈무리를 끝내고 집에 들어오시던 것도 냄새로 기억난다. 온갖 양념이 밴 엄마의 빨간 손뜨개 ‘쉐타’(스웨터)에 밴 김치냄새. 어머니의 파마머리에서도 파와 마늘, 고춧가루 같은 양념 냄새가 났다.
박완서 선생이 돌아가시고 유작집을 보는데, 당신이 새댁일 때 뽀글뽀글 머리를 파마하고 스웨터를 입은 사진이 한 장 있었다. 그걸 보고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엄마의 겨울 노동 차림을 다시 떠올렸던 기억도 있다.
왜 그때 우리 엄마들은 그리도 불편한 ‘나이롱 쉐타’를 즐겨 입었던 것일까. 바람은 숭숭 들어오고 그리 따뜻하지도 않을 것 같은 붉은색, 주황색 스웨터의 오래전 엄마들…. 우악스레 김장을 담그고 서넛 이상 되던 자식들 씻기고 먹이던 힘센 엄마들. 그녀들이 이 김장철에 다시 보고 싶어 목에 멘다.
요즘은 서울에도 토박이가 적고, 맛이 강한 남도식 김장양념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오래 전 서울에서는 김장할 때 새우젓을 많이 썼다. 내가 자란 변두리에선 서울 토박이가 별로 없어서 온갖 젓갈을 다 썼지만 가회동 친구네에 가면 늘 새우젓과 더 넣어봐야 ‘황새기젓(황석어젓)’ 정도였던 것 같다.
여담인데, ‘뿌리깊은나무’에서 나온 한국재발견 시리즈를 보면, 정인보 선생의 큰따님이신 정정완 여사의 서울사람에 대한 회고가 있다. 그중에 서울 장사꾼에 대한 내용이 인상 깊은데, 그들은 자존심이 세서 ‘사세요’ 하기보다는 ‘사려’ 하는 식으로 얼버무렸다는 것이다. 어쨌든 서울의 수많은 골목 장사꾼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서울의 골목을 걸을 때면 지금도 나는 그 코맹맹이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김장 하면 으레 돼지고기 수육과 굴을 곁들여 맛있는 밥을 먹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시절에는 그게 꼭 있었던 것 같지 않다. 살림이 퍽퍽하니 비싼 고기며 굴을 식구가 다 둘러앉아 먹을 형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매운 양념에 배추를 쭉쭉 찢어서 뜨거운 밥 위에 얹어 먹었던 정도의 기억만 있다. 얼마나 맵게 많이 먹었던지 헐어버린 입가가 더 쓰라렸던 통증이 지금도 생생하다.
김치를 다 버무리고 먼저 헐어서 먹을 순서를 정하고, 독에 차곡차곡 쟁여야 일이 끝나는데 당연히 아버지의 힘이 필요했다. 그때 아버지들은 김장보너스를 받았고, 김장 휴가도 있었으리라. 삽으로 언 땅을 푹푹 파서 독 묻을 자리를 마련했다. 대개는 그 전해에 쓰던 자리가 있어서 크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엄마가 뭐라고 타박하던 말씀도 생각난다. 이 집 저 집 남자들이 얼마나 자상하고 성실한가를 독 묻을 자리 것으로 알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는 독을 깊이 파지 않아서 김장이 오래 못갈 것 같다는 걱정이었던 것이다. 정말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요즘 남자들은 비교당할 구실 한 가지가 줄어서 다행이지 않을까.
춥고도 긴 겨울잠, 엄마가 삶아주던 김치말이국수! 그건 아버지가 필요한 일이었다. 문밖으로 나서서 맹추위에 몸을 움츠리며 김칫독을 열어 살얼음 서걱거리는 김치 한 포기를 꺼내와야 하는 것이었다. 나도 몇 번인가 했는데, 그때 엄마의 다짐이 들린다.
“위에 것 꺼내지 말고 밑에 있는 걸로 꺼내서 온나.”
위에 있는 김치는 말라서 아무래도 맛이 없었고, 새콤하고 물 많은 저 깊숙한 김치를 원하셨다. 비싼 깨소금과 참기름은 살짝 뿌리고, 삼삼한 김칫국물을 넉넉하게 넣어 비빈 그 겨울의 심야 국수. 나는 우리 김치가 세계의 자랑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밤의 국수만큼 맛있는 음식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미국의 한식당들이 한때 영업정지를 당하고 곤란을 겪는 일이 많았던 건 바로 ‘엄마(주인)가 정하는 유통기한’에 대한 문화 차이였다. 김치를 익히기 위해 실온에 내놓는 것도 불법이었고, 유통기한을 정하지 않고 무기한(?) 보관하는 것도 불법이었을 거다. 지금은 사정이 어떤지 모르지만 정말 이 신묘한 김치의 숙성과 보존, 그리고 그럴수록 맛이 좋아지는 미묘한 미각을 외국인들이 쉬이 이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재미있는 발견이 있었다. 인터넷으로 뉴욕타임스의 음식면을 보는데, 음식담당 기자가 직접 김치를 담그는 장면이 나오는 것 아닌가. 미슐랭 별 둘짜리 한식당이 있는 도시다운 한식의 위상인가. 그이는 피클과 김치 중간 정도의 김치를 담갔다. 특이한 건 젓갈을 쓴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탈리아 안초비를 다져서 넣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일본이 우리 김치를 모방하느니, 외국에 기무치라고 표기해서 파느니 분개하는 사람도 많은 듯하다. 나는 그것에 대해 한마디 할 지식은 없다. 다만 이런 일은 있었다. 일본에 가서 편의점에 갔을 때의 일이다. 한쪽 구석에 김치를 할인해서 팔고 있었다. 물어보니 ‘유통기한이 다 되어가서’라는 게 이유였다. 한 봉지 사서 열었는데, 팍 익은 걸 상상했던 나는 김이 샜다. 거의 익지 않은 김치였던 것이다.
일본 김치는 발효된 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소비자에게 맞춰 발효를 억제하는 방식으로 담근다고 한다. 더구나 달게 양념하기 때문에 발효가 빨라질 걸 염려해서 더 적극적으로 발효를 억제한다는 것이다. 익지 않은 김치라. 기호에따라 김치를 어떻게 먹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다. 그러나 잘 익힌 김치의 맛을 모른다면 절반의 매력은 포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은 분명하다. 이탈리아에서 요리 공부를 할 때의 일이다. 김치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사람은 아니어서 그럭저럭 그쪽 음식을 먹으며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일었다. 김치라기보다는 뭐랄까, 소금에 절이고 삭힌 음식에 대한 욕망이었다. 시장에 가서 고추와 무를 샀다. 소금물에 담가놓고 기다려보았다. 웬걸, 근 한 달이 되도록 전혀 익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나의 이탈리아식 백김치는 실패했다.
알고 보니, 고추와 무 모두 웬만해서는 소금에도 삭지 않는 아주 단단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무는 샐러리악이라고 영어로 부르는, 샐러리 맛이 나는, 보통은 익히거나 그냥 생으로 아삭하게 먹는 무였으니 제대로 될 턱이 없었던 것이다.
올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김장을 내 손으로 해봤다. 청소년들과 요리를 해서 나누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덕이었다. 무채를 썰고, 양념을 버무리는데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주 어설프게 김장을 마쳤다. 다시금 엄마의 스웨터에서 나던 양념 냄새가 그리웠고, 그 번개같이 야무지고 빠른 손놀림이 부러웠다. 올해 엄마의 김장에는 아마도 내 손을 보탤 수 있을 것 같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은가. 말하자면 우리들은 김장도 김장이지만, 어머니의 그 매운 손맛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니까.
박찬일 ‘인스턴트 펑크’ 주방장·<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