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인문학
김치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사실상 확정된 가운데 고유한 한국 김장 문화의 가치를 고찰해보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세계김치연구소는 5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김치, 김장 문화의 인문학적 이해’를 주제로 ‘제1회 김치학 심포지엄’을 열었다. 참석한 국내외 학자들은 “한국의 김장 문화에는 김치의 과학적 효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역사적, 문화적 요소들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유독 한국에서만 김장문화가 형성된 이유에 대해 세계김치연구소의 박채린 박사는 “밥상에서 김치가 차지하는 특별한 비중과 역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가정의 밥상 차림은 ‘밥, 국, 김치’로 이뤄진다. 중국이나 일본보다 불이나 조리도구를 덜 사용했던 우리나라에서는 찌고 볶고 튀기는 요리보다 생채소를 이용한 절임 요리가 발달했다. 특히 음식 재료는 물론이고 땔감도 구하기 어려운 겨울철에 불을 쓰지 않고도 간편하게 상에 올릴 수 있는 김치는 ‘고마운 음식’일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고려 말∼조선 초 학자인 권근은 ‘축채(蓄菜)’란 시에서 겨울철 김치를 언급했다.
‘시월이라 바람은 거세고 새벽에 서리가 내리니/울에 가꾼 소채 모두 거두어 들였네/맛있게 김장해 겨울철 궁핍함을 대비하니/진미를 차려 올리지 않지만 매일 맛볼 수 있네.’
박채린 박사는 “조선시대에는 여러 남성 문인이 김장을 주제로 한 글을 남겼다”며 “다른 집안일과 달리 김장은 남성들에게도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시대를 막론하고 김장을 할 때는 노동력 확보가 관건이었다. 주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일이라 가족이나 친지까지 동원됐다. 이웃들이 김장 품앗이를 하는 것도 흔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김장 노동력 확보가 어려우니 가정이 아닌 공장에서 김장을 전담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도시화와 핵가족화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이웃 간에 교류가 적어질수록 김장은 오히려 정을 쌓는 소중한 기회로 작용했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 새 거처를 마련한 이들은 김장을 함께 하며 새로운 이웃과 돈독한 정을 쌓아나갔다. 1974년 12월 10일자 동아일보엔 힘들여 담근 김치를 이웃과 나눠 먹으며 “남는 것은 없다만 주고받는 정은 남는다”고 한 어머니 말씀을 소개한 미혼 여성 독자의 글이 실리기도 했다.
전통문화가 만들어낸 김치냉장고
김장 스트레스가 여성에게만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자급자족하던 시절에서 벗어나면서 김장에 필요한 목돈을 마련하는 것이 남성들에겐 적잖은 부담이었다.
일부 회사에선 김장 보너스를 지급하기도 했다. 1960년대 한 일간지는 김장 보너스를 못 받은 샐러리맨의 푸념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깟 김장값 안 줘도 좋은데, 김장 보너스 준 사실이 정말 없다는 증명서라도 한 장 써주면 집에 들어가 술값으로 써버렸다는 의심을 받진 않을 텐데…” 하는 내용이었다.
아파트 거주자가 많아지면서 장독대를 대신할 김치냉장고가 필수 가전이 됐다. 강정원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는 김치냉장고에서 김장의 강력한 힘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보통 새로운 기술이 먼저 출현하고 그에 따라 문화가 변동하는 데 반해, 김치냉장고는 전통문화 안에서 기술이 진화한 독특한 경우라는 것이다.
강 교수는 “도시화, 핵가족화, 맛의 서구화 같은 강력한 변화요인에도 불구하고 김장은 김치냉장고를 출현시키면서까지 지속되고 있다”며 “김장은 한국인의 일상 속에 구조화된 실재적 전통문화 요소”라고 말했다.
이맘때면 곳곳에서 소외계층을 위한 김장 행사가 열리는 것도 한국 특유의 김장 문화와 연관이 적지 않다.
김광억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것은 한갓 음식의 공급이 아니라 애정과 배려, 공동체 아이덴티티의 나눔이라는 문화적 전통과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이다”라고 강조했다.
구미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