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태풍’ 하이옌 필리핀 강타] 필리핀 중부 스케치
세부=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피해 지역에서는 물과 음식을 구하지 못한 일부 시민들이 상점을 약탈하기도 했다.
○ 유령 도시로 변한 타클로반…약탈 행위 기승
폐허로 변한 도시에서 일부 시민들이 음식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곳곳에서 약탈을 벌이는 등 사회 혼란도 극에 달하고 있다. 주민들이 상점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물건을 훔치고 은행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부수고 돈을 빼가는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필리핀 민간항공국의 윌리엄 호키스 국장은 “칠십 평생 살아오면서 이처럼 참혹한 광경을 본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태풍에 가족을 잃은 주민들의 사연도 속속 나왔다. 주민 마빈 이사난 씨는 CNN과 인터뷰에서 “아내와 함께 15, 13, 8세의 세 딸을 안고 가다 파도에 휩쓸려 딸들의 손을 놓고 말았다”고 울부짖었다. 그는 “어린 두 딸은 시신으로 발견됐고 큰딸은 아직도 실종 상태”라며 “제발 큰딸만이라도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절규했다.
타클로반이 이처럼 하이옌의 직격탄을 맞은 이유는 이곳이 저지대 해안 도시인 데다 필리핀 정부가 태풍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당초 필리핀 정부는 침수 취약 지역을 중심으로 80만 명의 주민들을 사전 대피시켰다고 밝혔다. 하지만 하이옌의 풍속을 실제 시속 378km보다 느린 시속 270km 정도로 잘못 예상해 피해를 키웠다.
구호 전문가들은 타클로반 등의 피해 상황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열악한 도로 및 항공 사정 등으로 구조대와 치안 당국의 접근이 쉽지 않은 데다 사상자 수가 갈수록 늘고 있기 때문이다. 레이테 섬과 사마르 섬 일대의 항공 기능이 사실상 마비되면서 구호 물품을 대량으로 수송해 오기가 어렵고, 도로 위에 나뒹구는 건물 잔해 등으로 차량 이동도 쉽지 않다.
리처드 고든 필리핀 적십자사 총재는 “재난 현장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며 “재난 현장에 가려면 최소 하루나 이틀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이옌이 최초 상륙한 사마르 섬의 기우안 등 일부 도시도 피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세부=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한국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필리핀의 주요 휴양지 세부, 보홀, 보라카이 섬 등은 하이옌으로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하지만 항공편 결항 사태가 이어지면서 상당수 관광객들의 발이 묶이거나 귀국이 지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