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택(1972∼)
갓 내린 어둠이 진해지는 경우란
추억의 온도에서뿐이다
커피향처럼 저녁놀이 번지는 건
모든 길을 이끌고 온 오후가
한때 내가 음미한 예감이었기 때문이다
다 지난 일이다 싶은 별이
자꾸만 쓴맛처럼 밤하늘을 맴돈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 해도 우리는
각자의 깊이에서
한 그루의 플라타너스가 되어
그 길에 번져 있을 것이다
공중에서 말라가는 낙엽 곁으로
가지를 흔들며 바람이 분다
솨르르솨르르 흩어져내리는 잎들
가을은 커피잔 둘레로 퍼지는 거품처럼
도로턱에 낙엽을 밀어보낸다
매번 인연이 그러하였으니
한 잔 그늘이 깊고 쓸쓸하다
추억에 온도가 있을까? 그 온도라는 것은 내 속의 열기. 내가 슬프면 태양도 춥게 느껴지듯, 같은 추억이라도 그에 대한 내 열기에 따라 온도가 달라진다. 쓸쓸한 추억이라도 내 속에 열기가 있으면 달콤하게 느껴지고, 따뜻한 추억이라도 내 속에 열기가 없으면 미적지근하게 느껴질 테다. 혼자 사는 젊은이일 화자는 커피와 함께 추억의 씁쓸함을 음미한다.
화자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밖을 내다보고 있다. 소슬바람에 가로수 가랑잎들이 ‘솨르르솨르르 흩어져내리고’ 도로 위에 구른다. 진한 커피향처럼 번지는 저녁놀. 그 사람이 생각나는구나. ‘한때 내가 음미한 예감’, 예감이라기보다 직감이었지. 어쩐지 전화가 올 것 같은, 그러면 여지없이 전화가 오곤 했던 그 오후들…. ‘다 지난 일이다’!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그대 오기를 기다리던 날들이여, 까마득히 안녕! 입맛이 쓰다. 이성적으로는 납득하지만 쓸쓸한 건 어쩔 수 없다. 누가 전화할 것 같은, 아무런 예감이 없는 나날. 가을은 깊어가고, 오늘은 좀 슬퍼진다. 차분하게 서정적으로, 담담히 잘 쓴 시다. 인생의 그늘이나 그림자를 우려낸 듯 진한 커피가 문득 당긴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