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소리도 낼 수 없을 때 힘 발휘
영화 속 소녀와 신고 접수 요원이 전화 대신 문자메시지로 현재 상황을 주고받고 대응 방법을 찾았다면 소녀는 괴한에게 들키지 않고 목숨을 건질 수 있지 않았을까.
A 씨는 휴대전화를 열어 수신번호에 ‘112’를 입력하고 “양재동 ○○○번지 □□빌라 △△△호에서 남편이 난동을 부려요. 화장실에 숨어 있어서 전화는 못 받아요”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현관문의 비밀번호도 함께 보냈다. 문자신고를 받고 15분 만에 출동한 경찰이 문을 직접 열고 들어가 남편을 연행하면서 A 씨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112 문자신고 이용자가 증가하면서 음성 대신 버튼 입력만으로 신고가 가능한 문자 신고의 특성을 활용해 사건을 해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주로 경찰과의 통화를 시도하다가 발각될 경우 신고자가 위험에 처할 수 있었던 상황들이다.
9월 3일 오후 11시경 여대생 B 씨(22)는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아 자는 척하며 허벅지를 만지는 박모 씨(40)를 피해 정류장에서 내려 뒤차를 탔다. 그런데 박 씨는 B 씨를 따라 내려 뒤차에 탄 뒤 다시 옆자리에 앉아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B 씨는 자신이 탄 버스의 차량번호와 현재 위치, 남성의 인상착의를 적어 112에 문자를 보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순찰차를 몰아 B 씨가 탄 버스를 뒤쫓다가 박 씨가 서울 성북구 동선동의 한 정류장에서 내리자 추격해 검거했다.
4월에는 충남 천안시에서 “그랜저 허×××× 차로 끌려가고 있어요”라는 신고 문자 한 통을 남기고 꺼진 휴대전화의 위치를 경찰이 추적한 끝에 전처와 딸을 납치해 살해하려던 김모 씨(47)를 검거할 수 있었다.
문자 및 112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을 이용한 신고는 올해 1∼9월 12만1452건이었다. 수신 번호를 112로 입력해 문자를 보내기만 하면 신고가 가능한 시스템은 2004년 구축됐지만 지난해 12월 신고 문자에 사진 및 동영상 첨부가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개편하고 앱(앱스토어나 안드로이드마켓에서 ‘112긴급신고’를 검색한 뒤 내려받으면 됨)을 배포한 뒤 문자 신고가 크게 늘었다. 9월에는 하루 평균 751건이 접수됐다. 지난해 4월 오원춘 사건 이후 112 신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점도 신고 건수 증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됐다.
폭주하는 문자 신고를 접수하기 위해 서울 경기 등 주요 지방경찰청에서는 문자 신고만 전문으로 처리하는 요원을 근무시간대별로 1명씩 두고 있다. 5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내자동 서울지방경찰청 5층 112종합상황실에서 박수연 경장이 문자 신고를 접수하는 현장을 취재해 보니 비교적 한가한 평일 오후 시간대였는데도 3∼5분당 1건꼴로 신고가 접수됐다.
박 경장은 신고가 들어오면 내용의 긴급성과 위치에 따라 바쁜 손놀림으로 코드번호를 부여했다. “지하철에서 도촬(도둑촬영) 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문자가 도착하자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통해 파악한 신고자의 위치를 관할 지구대에 전송한 뒤 신고 내용을 코드2(경찰 출동 신고)로 분류했다. 살인 강도 날치기 절도 성폭행 납치 감금 가정폭행 등 중요범죄는 코드1(긴급 신고)로 분류돼 경찰이 우선적으로 출동한다.
112 문자 신고 시스템은 지난해 대대적으로 개편됐지만 상황별 매뉴얼을 더 명확히 갖출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는 문자 신고에 초점을 맞춘 신고 접수 매뉴얼이 없어 긴급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접수 요원의 재량과 판단에 의존해야 하는 구조다. 김종민 경찰청 생활안전과 지역경찰계장은 “신고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콜백이 오면 치명적일 수도 있기 때문에 접수 요원끼리 상황별 대응 요령을 지속적으로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