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들이 달라졌다. 요즘 스크린에선 예쁜 척, 약한 척, 모자란 척(백치미) 하는 '3척' 여배우를 볼 수가 없다.
키가 170cm인 모델 출신 김선아(38)는 14일 개봉하는 영화 '더 파이브'에서 하반신 마비 장애인 은아로 나온다. 그는 늘씬한 다리를 뽐내기는커녕 두 다리를 묶인 채 전동 휠체어를 탄다. 은아는 살인범에게 남편과 딸을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인물. 이런 심리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머리는 산발이고, 살인범과의 싸움 때문에 얼굴은 상처투성이다.
다음 달 개봉하는 '집으로 가는 길'의 전도연(40)도 팜 파탈의 매력을 발산하는 대신 마약 운반 누명을 쓰고 외국 감옥에 갇히는 거친 역할을 맡았다. 하지원(35)은 내년 초 개봉하는 '조선미녀삼총사'에서 검술 액션을 선보인다.
외모를 앞세워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배우가 사라진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한국 영화에서 스릴러, 누아르, 액션 같은 '센 장르'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올해 300만 이상을 모은 흥행작 13편 중 '7번방의 선물' '관상' '박수건달'을 제외하고는 모두 센 장르다. 거친 영화 분위기 속에서 여배우들의 우아함은 기대할 수도, 어울리지도 않는다.
1990, 2000년대에 비해 여배우가 돋보이는 멜로와 로맨틱 코미디는 눈에 띄게 줄었다. 최근 성공한 멜로 영화는 지난해 '건축학 개론'(411만 명) 정도다. 여자 주인공의 원 톱 영화나 로맨틱 코미디의 성적도 저조하다. 올 봄 최강희(36)가 원 톱으로 나온 '미나 문방구'는 33만, 김민정(31)을 내세운 '밤의 여왕'은 25만 명을 모으는 데 그쳤다.
한 영화제작사 대표는 "티켓 파워가 있는 새로운 20대 여배우들이 나오지 않는다. 이들의 이미지와 외모를 활용한 영화가 나올 수 없는 점도 여배우들의 중성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곽영진 영화평론가는 "한국 영화에는 주연이 2명 이상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외모보다는 상대 캐릭터와의 호흡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외모로 승부하는 여배우들이 사라진 데 대해 심영섭 영화평론가는 "한국 사회가 이전보다 여성을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해석했다. 강유정 평론가는 "이창동 감독의 '시'에서 윤정희 씨가 주연으로 나오듯이, 여배우가 오래 가기 위해서는 캐릭터에 녹아드는 노력을 해야 한다. 틀니 분장도 마다하지 않은 '설국열차'의 틸다 스윈턴이 좋은 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