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여성시대]2부 전문직<10>군인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A 중위는 부대장의 갑작스러운 회식 통보에 서둘러 개인 저녁 약속을 취소했다. 부대장 주관의 회식에서 불참은 용납되지 않았다. 술이 서너 순배 돌자 참석자들은 홍일점이었던 A 중위에게 술 돌리기를 권했다. 분위기에 맞춰 술잔을 돌리려던 그의 뒤통수로 B 중령의 말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꽂혔다. “술은 역시 여자가 따라야 제맛이지. 잘 한번 제조해 봐.”
이전에도 몇 차례 야한 농담을 건네며 A 중위를 당혹스럽게 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지금은 전역을 한 A 씨에게 그날의 회식 건은 항상 가슴 한구석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A 씨는 “비단 그 일만이 아니었다. 선배나 동기는 물론이고 후배들조차 나를 ‘군인’이 아니라 ‘여자’로 보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웠다”고 토로했다.
이런 탓에 성 관련 사고가 발생하면 군대는 축소·은폐 논란에 휩싸이기 일쑤다. 올해 4월 육군사관학교에서 여생도 성폭행이란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육사는 1주일가량을 쉬쉬했다. 언론에 보도되고 나서야 군 당국은 공식적으로 조사에 들어갔다. 군 관계자는 “군의 특성상 군에서 일어나는 일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며 “육사 사건도 언론 보도가 없었으면 자체 조사로 조용히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 軍이라는 특수성
남성 군인들은 군대 내에서 발생하는 성범죄 관련 사건을 어느 조직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로 군에서만 발생하는 특수한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남성 장교는 “군부대가 지방, 그것도 오지에 있는 경우가 많아 외부인을 접할 기회가 적고 군대 내에서 계속 얼굴을 맞대다 보니 여군을 이성으로 느껴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영관급 남성 장교는 “성범죄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남성 군인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보는 시각은 올바르지 못하다. 개인 문제를 조직 전체 문제로 여론을 호도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군대 성범죄가 단순히 욕정의 문제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엄격한 상명하복의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군대에서 계급은 곧 권력이라는 것이다. 여군에 대한 성 군기 사건도 결국 권력의 문제라는 얘기다. 최근 강원 화천군 육군 모 부대 인근에서 자살한 오모 대위(28·여) 사건의 경우 권력에 의한 성 착취를 여실히 드러냈다. 노모 소령(36)은 오 대위가 자신의 성관계 요구를 거절하자 상관이란 직책을 이용해 10개월 동안 언어폭력, 성추행, 야근 등으로 오 대위를 괴롭힌 것으로 알려졌다.
○ 여전한 솜방망이 처벌
국방부도 사안의 심각성을 느끼고 ‘성 군기 예방지침’ 등을 마련해 일선 부대에서 성범죄 예방 교육을 시키고 있다. 이 지침에는 △남녀 군인 및 군무원의 신체 접촉은 악수만 가능하다 △남녀 군인 및 군무원 2명만 사무실에 있을 때는 반드시 출입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회식 자리에서 2차 참여를 강요하지 않는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최근에는 김관진 국방부 장관 주관으로 대규모 성폭력 예방 직장교육을 실시했다.
그럼에도 군대 내 성범죄 발생률이 좀처럼 줄지 않고 있는 데 대해 성범죄 조사가 형식적이고 처벌이 가볍기 때문이란 지적도 제기된다.
서영교 민주당 의원이 10월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3년 6월 말까지 여군이 피해자인 성 관련 범죄는 총 61건. 군별로는 육군이 40건(65.6%), 공군이 10건(16.4%), 해군이 9건(14.8%), 국방부 2건(3.3%)이었다. 특히 해군은 여군을 대상으로 한 범죄 9건 모두 성 관련 범죄인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는 실형률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61건의 성 관련 범죄 중 단 3건(4.92%)에 대해서만 실형이 내려진 것으로 밝혀졌다. 반면에 기소유예, 선고유예, 공소권 없음, 혐의 없음, 죄가 없음 등으로 죄를 묻지 않은 경우는 39건(63.9%)에 이르렀다.
손영일 정치부 기자 scud2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