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균 문화부 기자
선배는 “이 업계에선 흔히 있는 일이다. 어떤 아이템이 성공을 거두면 동업자나 피고용인이 앞선 경험의 문제점을 보완해 후발주자로 독립한다”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긴, 주말에도 이것저것 요리해서 아이들 먹이는 게 삶의 낙인 그에게 프랜차이즈 사장은 어울리지 않는다. 선배는 훗날 그 업체를 찾아가 한 가지만 요구했다. 비슷하게 따라 그린 엠블럼이 얼마 뒤 바꿔 달렸다.
최근 대중음악시장에서 한동안 또 ‘표절’이 화제였다. 겨울이 오니 찬 바람이 이는구나 싶은 것처럼 무감했다. 여론의 대세는 이제 ‘뭐 그런 하찮은 일 갖고…’인 듯하다. 관련 기사에 달린 독자 반응은 비슷비슷했다. “기자들아, 지겹다. 표절이라고 명확히 결론 나면 써라.” “많은 사람이 그 노래로 행복하게 즐겼으면 됐지 왜 쓸데없이 딴죽이냐. 도대체가 남 잘되는 꼴을 못 봐요. 못된 놈들 같으니.” “표절 논란 타고 한국 음악시장에 이름 알린 걸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더이상 문제 삼지 않는 거잖아.”
레퍼런스. 클리셰. 한국어로 충분히 할 수 있는데 굳이 외국어를 내세우는 상황의 까닭은 대개 비슷하다. ‘참조’라고 하면 출처를 밝혀야 할 듯하고, ‘상투적 표현’이라고 하면 멋없게 느껴진다. 무언가를 그저 참고해 재가공했을 뿐인지, 무의식적으로 상투적 표현을 사용했을 뿐인지, 그건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안다. 표절인지 아닌지, 가장 정확한 기준은 만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기술복제시대의 정점이다. 첨단 기술은 얼마나 더 정교하게 복사하고 모아 붙여 흔적 없이 짜 맞출 수 있는지 한없이 경쟁한다. 다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며 진리인 듯 고개를 끄덕인다. 회화보다 콜라주가 세련됐다 여긴다. 무엇이든 표절인지 아닌지 묻는 것, 촌스럽다. 훌륭하게 재해석하고 재가공해서 성공했으면 그만이지, 누가 처음 만들었다는 사실이 뭐 그리 중요한가. 좋은 게 좋은 것인 줄 모르고 흥겨운 잔치 분위기에 공연히 표절 운운하며 찬물을 끼얹는 것, 어리석다.
그래도 묻는다. 답은, 기준은, 바로 당신 마음속에 고이 감춰두지 않았느냐고. 스스로도 잊어버린 마음속 어딘가에.
손택균 문화부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