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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진영]올해의 건축

입력 | 2013-11-14 03:00:00


이진영 문화부 차장

해마다 연말이면 언론은 그해의 인물을 뽑는다. 올해의 인물은 누가 될까.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사상 처음으로 해산될 위기에 놓인 정당의 정신적 지주? 야구 종주국에서 가을의 전설을 쓴 괴물 투수? 올해의 인물 후보는 많지만 올해의 건축을 묻는다면 서울시 신청사가 될 것이다.

올 2월 본보는 건축전문가 100인에게 의뢰해 한국 최고와 최악의 현대건축을 선정했다. 여기서 최고작보다 더 주목받은 것이 최악의 건축으로 뽑힌 서울시 신청사였다. “역사적 무책임과 지적 태만” “복구 불가능한 파국” 같은 날선 혹평과 함께 39명이 이를 태작으로 꼽았다. 최근엔 신청사 건립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 시티:홀’이 상영되면서 설계자와 감독이 함께하는 포럼이 잇달아 열리고 있다.

하지만 수많은 포럼에도, 신청사가 주인공인 106분짜리 영화에도 건축을 의뢰한 건축주는 보이지 않는다. 7년간 3000억 원을 들여 어떤 청사를 지으려 했고, 중간에 설계가 왜 바뀌었는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는다. 신청사의 콘셉트 설계자인 건축가 유걸만이 이런저런 자리에 불려나가 몰매를 맞으면서도 성실히 답하고 있을 뿐이다.

좋은 건물은 좋은 건축주가 만든다. 건축의 창세기를 열었다는 롱샹 성당, 20세기 최고의 건축으로 꼽히는 라투레트 수도원은 마리알랭 쿠튀리에 신부라는 건축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당시 기울어가던 가톨릭의 부흥을 위해서는 예술의 힘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건축의 목표를 실현해줄 수 있다는 이유로 ‘무신론자’인 르코르뷔지에에게 설계를 맡겼다. 그가 아니었다면 롱샹도, 라투레트도 없었다.

시청사 같은 공공건물의 건축주는 시민이고, 시민들을 대표하는 건축주가 시장이다. 김광현 서울대 교수는 “잘못된 건물의 책임은 자기가 어떤 집에 살 것인지 뚜렷하게 말하지 못한 채 명품만을 원한 건축주에 있다”고 말했다. 관심도 없다가 다 지은 뒤에야 “이게 뭐냐”며 화내는 시민,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시장, 심사일에 임박해서야 불려나가 당선작을 선정한 심사위원. 이 모든 사람이 책임을 나눠져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해외의 설계공모전을 경험해본 작가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한국 공공건축 발주제도의 문제가 무엇인지 드러난다. 새 건물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그곳의 역사적 도시적 맥락부터 주변에 있는 맨홀이나 전봇대처럼 깨알 같은 정보가 담긴 도면까지 건물이 들어설 땅에 대한 종합적인 보고서가 두툼한 책자 형태로 전달돼 현장에 가보지 않고도 설계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조성룡 성균관대 석좌교수는 “출제가 잘돼야 좋은 답이 나오는 법”이라며 “공모전의 안내서가 충실하면 이를 기준으로 설계안들이 출품되고, 이 안내서가 기준이 돼 심사도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 73세인 유걸은 미국과 한국에서 모두 건축상을 받은 실력파다. 그에게 서울시 신청사는 일흔 줄에 만난 최악의 인연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악평에 시달려도 관심 받는 건물이 좋은 건축”이라며 “내 작품이 신문의 부동산면이 아닌 문화면에서 논의되는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서울시 신청사의 실패는 ‘공공건물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가’라는 논의의 출발점이 됐다. 그래서 올해의 건축은 역설적이게도 서울시 신청사다.

이진영 문화부 차장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