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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경의 ‘100세 시대’]‘100세 시대’ 출발은 ‘사소한 일에 목숨거는 일’부터 버리는 것

입력 | 2013-11-14 03:00:00


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후회요? 아무 데나 최선을 다한 거죠.”

‘은퇴한 뒤 가장 후회하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내 질문에 대한 K 씨(56)의 대답이었다.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최선을 다한 게 후회스럽다고? 하지만 얘기를 더 들어보니 K 씨 말 중에 방점이 찍힌 대목은 ‘최선을 다했다’는 게 아니라 ‘아무 데나’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었다.

직장 다닐 때 술자리에 빠진 적이 없었어요. 잔소리하는 아내한텐 ‘술자리에만 있는 고급정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큰소리치곤 했죠. 그런데 그런 식으로 최선을 다한 게 얼마나 어리석었나, 돌이켜 보니 후회가 되는 거예요.”

“술자리에서 오가는 고급정보가 생각처럼 많지 않았나 보지요”라고 묻는 내게, K 씨가 대답했다.

“정보는 많았지만 쓸데없는 정보가 더 많았어요. A급 정보는 술자리에 떠돌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데 엄청 시간이 걸린 셈이죠.”

그는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정보도 정보지만 그때는 제가 동료들과 왁자지껄 떠드는 그런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내가 그런 걸 정말 좋아했던 걸까, 의문이 들어요…요즘 생각해 보니 그때 내 마음에 싹트던 불안감과 좌절감에 직면하기가 싫어서, 아니 두려워서, 술에 의존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술 마시느라고) 엉뚱한 데 에너지를 쏟으면서 시간을 물 쓰듯 쓴 셈이죠. 그 시간에 좀더 소중한 일을 했다면 지금쯤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하루하루가 지금처럼 이렇게 삭막하고 황량하진 않을 것 같아요.”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엊그제 노인복지 현장에서 만난 중견 사회복지사의 말이 떠올랐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은퇴자들 때문에 점점 더 일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하며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은퇴자들이 많아요. ‘액티브하게’ 나이 든다는 취지는 좋지만, 무엇을 위한 ‘액티브’인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는 거죠. 괜찮은 자리에서 일하던 분일수록 ‘장(長)’ 자리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몰라요. 복지관의 ‘반장’ 자리를 놓고도 치열하게 싸울 정도니까요. 또 마음속에 여유들이 없어요.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으면서도 가난한 어르신에게 일자리를 양보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면 정말 안타까워요.”

사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K 씨와 같은 베이비붐 세대의 사람들, 혹은 60대 이상의 사람 모두 ‘할 수 있다’는 구호에 맞춰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배우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아무 데나 최선을 다하는 건 ‘수명 60세 시대’였던 과거의 미덕이다. 즉, 남이 시키는 일만 하며 살아도 인생은 빠듯하고 일을 그만둔 후엔 남들 다 하는 해외여행이나 다녀오고, 잠깐 앓다 죽던 시대의 얘기라는 뜻이다. ‘60세 시대’엔 잘못 살았다 한들 과거를 되짚어보며 후회할 시간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100세 시대’는 그렇지 않다. 남이 시키는 일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한 자기 투자도 중요하다. ‘벌이로서의 일’뿐 아니라 ‘놀이로서의 일’에 대한 중장기적인 설계도 필요하다. 한창 바쁘게 일하고 있는 30, 40대부터 은퇴 후 삶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도 다른 점이다.

문제는 30, 40대가 은퇴를 고민하기엔 바빠도 너무 바쁘다는 것이다. 이들은 휴가 기간에도 일하듯 바삐 돌아다닌다. 게다가 요즘엔 밖에서 일도 잘하고 안에서 아이도 잘 돌보는 ‘스칸디(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 대디’ 역할까지 해야 하니 도대체 언제 자신의 미래를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겠는가?

최근 발표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삶의 질 평가에서도 한국은 연평균 노동시간이 2090시간으로 OECD 평균(1776시간)을 훨씬 넘는,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로 나타났다. 지난달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직장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근로시간 단축과 임금’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직장인 10명 중 7명은 ‘돈’보다 ‘쉴 수 있는 시간’을 더 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개개인이 100세 시대에 걸맞은 생각과 미래 설계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관심과 지원도 필요하다. 이 점에서 이웃나라 일본의 후생노동성 장관이 2008년 발표한 ‘근로 전성기의 장기 휴가’ 제안은 신선한 충격을 준다. 40대 직장인이 6개월이나 1년쯤의 ‘긴 휴가’를 가질 수 있도록 국가와 민간이 함께 노력하자는 제안이다.

물론 일본도 ‘40대의 장기 휴가’ 안은 말 그대로 ‘발상’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래도 부러운 건 “일본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이런 논의도 한다”라고 내가 설명했을 때,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표하던 30, 40대 ‘피곤한’ 중년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어서다. <끝>

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