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여성시대]2부 전문직 <13>기자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 1960년대 여기자 출입처는 창경원
1963년 한국일보 공채로 입사한 기자이자 최초의 여성 주필, 최초의 여성 사장을 지낸 장명수 이화학당 이사장에게 기자 생활을 시작했을 때 여기자를 바라보는 분위기에 대해 묻자 “당시 여기자의 출입처는 창경원 정도였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1977년 TBC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최춘애 전 KBS아메리카 사장의 회고담도 다르지 않다. “내가 입사할 때만 해도 여기자는 남성 지원자에게는 필요 없었던 교수 추천서까지 받아야 했다. 여성 아나운서도 결혼하면 퇴사한다는 각서를 쓰는 때였다. 여기자를 똑같은 인력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양념, 구색으로 여기니까 문화부, 편집부, 교열부, 외신 등으로 부서를 한정시켰다.”
이는 사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동식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도 ‘세상은 바꾸고 역사는 기록하라―끈질기고 당차게 오늘을 달리는 여기자들의 기록’이란 제목의 책에서 “(취재를 할 때) ‘시집이나 가지’ ‘여자가 무슨 기자야’라는 말로 기죽이던 취재원들과 대면해야 했다”고 전한다.
승진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과거 여기자들은 입사 동기나 후배를 상사로 모시고 일하는 게 다반사였다. 국내 스포츠신문 여성 편집국장 1호인 김경희 전 일간스포츠 편집국장은 4년 아래 후배가 직속 부장으로 왔을 때 사흘 동안 출근도 안 하고 고민했다고 한다. 여기자들이 차별을 넘어서는 방법은 ‘버티기’였다. 장명수 이사장은 “나 역시 동기가 부장일 때 차장으로 일했고 후배 몇 명이 편집국장이 되는 동안 계속 부국장이었고, 끝내 편집국장은 못해봤다”면서도 “하지만 끝내 버텼기 때문에 주필도 될 수 있었고 사장도 될 수 있었다”고 했다. 김 전 국장도 결근 끝에 “이대로 그만둘 수 없다”는 생각으로 돌아와서 버텼다고 한다. 이들은 “남성보다 두 배 세 배 노력해야 동등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현실에서 무조건 열심히 일했다”고 입을 모은다.
○ 성별이 무색한 활약
한 신문사 사회부 3년차 여기자의 말이다. “2012년 1월 경기 여주시에서 조폭 수준의 학교폭력이 일어났는데 혼자 여주로 가서 두목을 찾으라는 선배의 명령이 떨어졌다. PC방을 다 뒤져 두목을 찾긴 찾았는데 20여 명의 불량 청소년 무리에 둘러싸여 취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자 혼자 몸으로 1박 2일 그들과 모텔 방에 함께 머물며 ‘어떻게 폭력에 가담하게 됐는지’ ‘무슨 이유로 이런 조직을 계속 유지한 것인지’ 등을 취재했다. 처음엔 무서웠지만 차츰 이들을 남동생처럼 생각해 누나처럼 대한 것이 그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결정적 계기가 됐다.” ‘금녀의 영역’이던 사회부 정치부를 거친 한 10년차 여기자는 “취재원이 나보다 훨씬 나이도 많은 남자일 경우가 대부분이고 모임에 가도 남자들뿐이어서 외로울 때가 많았지만 뒤돌아보면 여자라는 희소성이 오히려 장점이 됐다”고 전한다.
한편 2012년 여름 중동의 한류 현장을 취재하러 간 또 다른 신문사 여기자 B 씨. 당시 중동의 민주화 바람을 직접 보는 역사적 증인이 될 수 있었지만, 거센 시위로 밤에는 곳곳에서 총소리가 들릴 정도여서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광장 르포 취재를 하던 중 갑자기 수백 명의 인파가 B 씨를 둘러싸고 알아들을 수 없는 아랍어로 외치면서 삿대질을 했다. “살고자 하는 마음에 ‘당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왔다’고 (영어로) 말하자, 한 남자가 나서서 그간의 시위 경과를 들려줬다. 민주화에 대한 시민들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고 B 씨는 돌아봤다.
여기자들의 활약은 사회의 주요 이슈들을 바꿔놓기도 했다. 특히 직장 내 성희롱 문제, 보육, 노인 돌봄 등 복지 이슈에는 생활과 밀접한 여기자들의 시선이 유리하다. 한 중견 여기자는 “가정 내 의사결정의 중심이 남편에서 아내로 바뀐 지 오래되었고 소비주체로서의 주부나 여성의 목소리가 이제 ‘역차별’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커졌는데 여론을 전하는 신문사의 목소리는 아직도 가부장적, 남성적이란 느낌이 든다”라며 “하지만 서서히 바뀔 것”이라고 낙관했다.
한국여기자협회가 실시한 여기자 직급별 현황조사에 따르면 간부급 여기자 중 가장 많은 차장급 여기자의 비율은 2003년 6.1%, 2008년 11.8%, 2013년 12.4%였다. 차장급 여기자의 비율은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배로 증가한 이후 2013년까지는 조금 늘었을 뿐이다. 간부직에 들어서기 시작한 차장급 여기자의 증가율은 지난 5년간 주춤했다. 여기자들에게 여전히 승진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이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 여기자의 그늘, 육아
여기자 수는 늘어나지만 고위직은 답보 상태인 이유는 문제일까. 정성희 한국여기자협회장(동아일보 논설위원)은 “여기자들의 경력을 가로막는 주된 요인은 다른 전문 분야와 마찬가지로 출산과 육아”라고 말한다. 정 회장은 “‘기자는 노처녀가 하기에 가장 좋은 직업’이라는 농담이 있지만 이는 일면 진실을 담고 있는 말”이라면서 “유능한 여기자가 갑자기 그만두었다는 소식이 들리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 십중팔구 자녀 교육 문제 때문일 것”이라고 밝혔다.
‘엄마 기자’가 힘들어하는 부분 중 하나는, 사건 사고가 예고 없이 일어나는 업무 특수성 때문에 늘 ‘대기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자 C 씨는 “아이가 ‘엄마 오늘 몇 시쯤 와?’라고 물을 때 딱 몇 시라고 답할 수 없어 힘들다”면서 “뉴스라는 게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늘 긴장상태로 언제 어디서든 뛰어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이 직업의 고민이다. 막 저녁에 잠자리에 들려다가 뛰어나온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했다.
모 신문사 정치부 여기자인 D 씨는 “모처럼 집에 일찍 와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려던 차에 사내 데스크로부터 ‘이런 뉴스가 있는데 맞는지 확인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전화로 이리저리 알아보다 아이에게 와 보니 울다가 잠들어 있었다”며 안타까워했다.
김지영 오피니언팀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