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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심는 탈북자 교육이 ‘탈남’ 부추긴다

입력 | 2013-11-15 16:03:00

‘탈북-입북-재탈북-구속’ 김광호 사건의 교훈




《2009년 탈북, 남한에 정착했던 김광호 씨가 북한으로 돌아갔다가 재탈북,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충격을 안겼다. 탈북자 단체 관계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현행 탈북자 교육을 되짚어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1월 24일, 북한 조선중앙방송에서는 북한으로 되돌아온 ‘탈북자’ 4명의 합동 기자회견을 방송했다. 이들 중엔 김광호(37) 씨도 있었다. 북한은 주민들에게 체제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귀환 탈북자’ 기자회견을 공개하고 있다. 벌써 8명이 넘는다. 정부는 북한으로 돌아간 탈북자의 정확한 숫자를 공개하고 있지 않지만 탈북자 단체에서는 1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목숨을 걸고 ‘자유대한’ 품에 안겼던 그들이 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던 차에 지난 6월 김 씨가 북한을 다시 탈출했다가 중국에서 공안에 붙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 씨는 국내로 소환됐고,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전 재산 들고 북한행

김 씨의 사연은 드라마틱하다. 2009년 8월 동거녀 김모 씨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한 그는 한국행을 도와주겠다는 브로커를 통해 라오스, 태국을 거쳐 그해 11월 한국으로 들어왔다. 전남 목포에 정착한 그는 동거녀 김 씨와 결혼식도 올리고 딸도 낳았다. 일용직이었지만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았다. 자동차도 샀다. 한국 사회에 안착하는 듯 보였다.

그러던 그가 지난해 10월 갑자기 남한 생활을 정리했다. 자동차도 팔고, 은행에서 모든 예금과 적금을 해약해 현금화했다. 그렇게 전 재산 4000만 원을 들고 아내, 아기와 함께 중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그는 소지한 돈을 북한 당국에 뺏기지 않으려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에 있는 어머니에게 돈을 맡긴 후 자수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0월 말이라 두만강 물은 불어 있었고 날씨도 궂어 어린 딸을 데리고 강을 건너기가 쉽지 않자 선양에 있는 북한영사관을 찾아갔다. 영사관 직원의 지시에 따라 칠보산호텔에서 9일 동안 대기하다 11월 3일 고려항공 비행기를 타고 평양으로 정식 입북했다.

그는 평양의 호텔에서 2개월 정도 머물며 국가안전보위부의 조사를 받았다. 이때 국가정보원의 합동신문 조사방법과 집중 신문 사항, 중앙합동신문센터의 위치와 구조, 센터 내 탈북자 수용 장소 등을 알려줬다. 센터 내에서의 생활도 일일 일과표로 만들어 제출했다. 하나센터 위치, 시설, 교육내용, 교육담당자 신원은 물론 한국에서 알게 된 탈북자 23명의 신원, 자신을 관리했던 경찰관들의 인적사항까지 진술했다.

1월 24일엔 아내와 함께 기자회견에 참석해 “남조선은 사기와 협잡,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험악한 세상” “탈북자는 남조선 괴뢰들이 벌이는 반공화국 인권소동의 희생자” “돈만 있으면 증인도 원수로 돌변하고, 허위증언을 하고 돈이 없으면 피해자도 피고석에 앉아야 하는 불법 무법의 사회”라고 한국을 비난했다.

기자회견 후 김 씨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북한 당국으로부터 새집도 선사받았다. 하지만 당 간부가 그에게 하사된 새집을 가로채고 헌 집을 지정해줬다. 뒤늦게 사실을 안 그는 새집을 돌려달라고 중앙당에 신소(민원)를 넣었다가 오히려 신변에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평양에서는 환대를 받는 것처럼 보였지만 고향에서는 철저한 감시 대상이 됐다.

당 간부들에게 이런저런 시달림을 받기도 했다. 그가 가져간 전 재산은 중국에서 두만강을 도강해 북한으로 잠입하려던 과정과 북한의 최종 입북 허가를 기다리는 동안에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남은 돈도 툭하면 집으로 몰려와서 술이며 고기를 요구하는 당 간부들을 대접하느라, 그리고 주변사람들에게 무심코 “남한에선 잘 먹고 잘살았다”는 말을 내뱉었다 체포되는 바람에 이를 무마하느라 탕진했다.

북한 사회에 재정착하는 데 실패한 데다 신변의 위협까지 느낀 그는 일가족과 처제, 처남을 데리고 다시 북한을 탈출했다. 중국에서 남한으로 돌아오기 위해 브로커와 연락을 취하던 중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북한은 김 씨 일행을 모두 넘겨달라고 요구했지만 중국 당국은 북한 국적인 김 씨 처남과 처제는 북한으로 압송하고, 한국 국적인 김 씨와 아내, 딸은 한국대사관으로 넘겼다.


브로커는 필요악?

중국 공안에 붙잡힌 김광호 씨를 도운 김용화 탈북난민인권연합 대표(왼쪽)와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국가보안법상 잠입·탈출, 자진지원·금품수수, 북한 보위부와 접촉하고 기자회견 등을 한 데 따른 국가보안법상 회합·통신, 찬양·고무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결국 한국에서 3년여간 살면서 모은 전 재산만 날리고, 처남과 처제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 뒤, 자신과 아내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신세가 된 것.

탈북자 단체 관계자들은 하나센터 교육이 조금만 더 체계적이었다면 김 씨가 그런 어리석은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김용화 탈북난민인권연합 대표는 “남한에 막 들어온 탈북자들에게 하나센터 교육 강사들이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앞으로 남한 생활을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강의 내용을 보면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게 하지 못하고 환상을 심어주거나 잘못된 생각을 갖게 만든다”고 꼬집었다.

김 씨가 남한 사회에 불만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는 브로커 문제만 해도 그렇다. 그는 검찰 조사에서 북한으로 돌아간 이유에 대해 브로커 때문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서 한 기자회견에서도 “브로커에게 당했다”며 분개했다.

그는 한국으로 오기 위해 브로커에게 주기로 한 500만 원 중 100만 원을 갚지 않아 벌어진 소송에서 패소했다. 설상가상으로 브로커는 판결을 근거로 정부가 김 씨에게 지원한 임대주택 보증금을 가압류했다. ‘목숨을 걸고 탈북한 대가가 고작 이런 것이냐’는 불만이 커지던 즈음 다른 탈북자 한 명이 북한에 돌아가 기자회견을 하고 가족과 상봉하면서 환영받는 장면을 TV로 보게 됐다. 항소심에서 이길 가능성도 없고 생활을 비관하던 차에 북한이 탈북자도 용서해주며 환영한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북한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그의 검찰 진술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게 그를 아는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김 씨의 한국행을 도왔던 김용화 대표는 “브로커가 김 씨에게 요구한 금액은 1인당 250만 원이었다. 아내 김 씨까지 두 사람 몫으로 500만 원을 요구한 것이다. 솔직히 실제 경비만 해도 그 이상 들어간다. 김 씨가 거친 한국행 루트는 그나마 교회에서 지원해 주기 때문에 가장 저렴한 편이다. 법원에서도 300만 원까지는 브로커 비용을 인정한다”며 답답해했다.

김 씨보다 먼저 탈북해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 A씨는 “김 씨가 오해를 해서 억울하게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씨를 데리고 온 브로커들은 교회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들도 실적을 보여줘야 돈을 받을 수 있으니까 김 씨를 교회에 데려갔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교회가 ‘우리가 당신을 구하기 위해 150만 원을 지원했다’는 말을 했을 거고, 그 말을 들은 김 씨는 자신이 주기로 한 돈에서 그 액수를 빼고 줘도 되겠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교회의 지원 덕에 자신이 한국으로 오는 비용이 250만 원으로 낮아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北으로 간 진짜 이유

A씨는 하나센터에서 탈북자들을 교육할 때 “브로커에게는 돈을 한 푼도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통일부 공무원들도 있다며 “그 때문에 브로커와 탈북자 사이에 시비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우려했다. 탈북자를 한국에 데려오려면 돈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 비용을 정부가 지급해주는 것은 북한과의 관계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A씨는 “통일부 공무원들이 현실성 없는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탈북자를 한국에 데리고 오기까지의 실제 비용을 알려주고, 그 이상을 요구하면 거절하라고 알려주는 게 현실적”이라고 충고했다.

김 대표는 “김 씨가 북한에 들어간 진짜 이유는 가족을 데리고 나오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전부터 “북에 있는 가족들을 데리고 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는 것.

“그가 중국에 들어가서 여기저기 브로커 조직에 가족들을 데려와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김정은 체제가 갓 들어선 상태여서 위험성이 큰 때였다. 1000만 원을 준다고 해도 브로커들이 움직이지 않을 때였다. 상황도 안 좋은 데다 브로커 비용을 아끼려는 마음에 자신이 직접 북한에 들어가 가족을 데리고 나오다 붙잡힌 것으로 보인다.”

탈북자 B씨는 “하나센터에 들어오면 먹을 게 풍부하다. 그걸 보면 북한에서 굶주리고 있을 가족 생각이 제일 먼저 난다. 탈북자들이 사회에 나가자마자 북한에 남은 가족을 데려오려고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갓 내려온 탈북자들은 물정을 몰라 너무 쉽게 생각한다. 지난해에도 하나센터를 나오자마자 가족을 데리고 오겠다며 중국에 갔다가 중국 공안에 잡힌 탈북자가 있었다. ‘가족을 살리려면 북한으로 들어오라’는 협박에 못 이겨 결국 재입북했다”고 안타까워했다.

탈북자들이 한국에서 가장 먼저 받는 하나센터 교육.



김 대표는 “김 씨도 중국으로 재탈북한 뒤엔 꼭꼭 숨어 있어야 하는데, 동네 슈퍼마켓에서 하루에도 수차례씩 여기저기 브로커 조직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아 공안에 신고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혀를 찼다. 그는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하나센터에서 현실적인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성공사례만 들려주지, 사회에 나간 후의 어려움은 잘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다. 남한에선 다 잘 먹고 잘살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깨줘야 한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교육을 철저히 시켜야 한다. 탈북자들이 가장 불만을 갖는 게 돈 문제다. 취직을 하면 자신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오해한다. 매출 규모에 비해 자기 월급이 터무니없이 적다고 여겨 불만을 갖는다. 북한의 임금 계산법과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 계산법이 다르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차이를 가르쳐야 한다.”


‘탈남’하는 탈북자들

경제적 문제는 많은 탈북자가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해외로 나가는 ‘탈남’의 원인이다. 한국으로 온 탈북자가 2만5000명에 달하는데, 다시 한국을 떠난 숫자가 3000~4000명이다. 캐나다, 영국 등지로 간 사람도 700명이 넘었다. 이들은 대개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실을 숨기고 ‘탈북 난민’으로 가장한다.

몇 년 전부터는 탈북자에게 해외 난민화(化)를 부추기는 탈북자 출신 브로커들도 생겨났다. 이들은 탈북자들에게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불법 대출을 받도록 꼬드기고, 그 과정에서 고액의 수수료를 챙긴다. 이렇게 빚을 내고 떠났다 난민 인정이 안 되면 한국으로 되돌아올 수도 없다. 결국 또 다른 나라로 건너가 난민 신청을 하는 등 국제 미아가 되기 십상이다. 정광일 북한민주화운동본부 인권조사실장은 “영국에 갔다가 쫓겨나면 네덜란드로, 거기서 쫓겨나면 캐나다로 가는 식으로 움직인다”며 “그 과정에도 브로커들이 있어 다 연결해준다”고 말했다.

“보통 해외 난민으로 나갔다가 인정을 못 받고 돌아온 탈북자들이 브로커가 돼 경제적으로 힘들어하는 탈북자에게 접근한다. 어떤 탈북자는 8000만 원을 대출받았는데 막상 캐나다행 비행기에 오를 때 손에 쥔 돈은 비행기표와 현금 1500만 원뿐이었을 만큼 많이 뜯긴 경우도 있다. 또 누군가는 수억 원짜리 자동차를 자기 명의로 구매해서 팔아넘기고 사채까지 끌어들이는 등 5억 원 가까운 빚을 내고 호주로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왔다. 갚을 길이 막막하다고 하소연을 하더라.”

자녀들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등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떠나는 탈북자도 적지 않다. 3년간 한국에서 살다가 2008년께 영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탈북자 이모 씨는 “한국에서 살 때는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이 친구들로부터 탈북자라고 따돌림 받았지만 여기에서는 학교 생활에 아주 잘 적응하고 있다”면서 “이곳에서는 그릇 닦는 일을 해도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탈북자들을 제대로 품어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 한다.

최호열 기자 | honeypapa@donga.com

<이 기사는 신동아 2013년 11월 65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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