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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전승훈]유네스코의 파산위기, 한국에는 기회

입력 | 2013-11-18 03:00:00


전승훈 파리 특파원

프랑스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UNESCO) 본부 1층 로비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기증한 초등학교 4학년 ‘자연’ 교과서가 전시돼 있다. 아이 두 명이 천체망원경으로 별을 바라보고 있는 교과서의 뒤표지에는 특별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금번에 유네스코와 유엔한국재건단(UNKRA·운크라)에서 인쇄기계의 기증을 받아, 국정교과서 인쇄전속공장이 새로 생겼는바, 이 책은 그 공장에서 박은 것이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정부 수립 후 유엔에 가입하려 했으나 안보리 상임이사회에서 소련의 반대로 좌절됐다. 대한민국이 유엔 산하 국제기구에 처음 가입한 것은 1950년 6월 14일 유네스코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열하루 만에 6·25전쟁이 터졌다.

1954년 9월 16일.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서 문교서적(대한국정교과서 전신) 인쇄공장 낙성식이 열렸다. 먹고살 것도 없던 시절에 유네스코가 1년에 3000만 권의 책을 찍어낼 수 있는 인쇄시설과 용지를 지원해준 것이다. 이 책으로 공부한 코흘리개 학생이 60년 만에 유엔 사무총장이 돼 방문하자 유네스코 사무국 직원들도 감격했다.

이렇듯 한국에 큰 도움을 줬던 유네스코가 요즘 파산 위기에 몰렸다. 20일까지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리는 제37차 총회의 분위기는 긴장감마저 감돈다.

재정위기는 2011년 10월 팔레스타인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인 후부터 시작됐다. 이스라엘의 맹방인 미국이 팔레스타인을 정식 회원국으로 받아들인 국제기구에 지원할 수 없다는 국내법 규정을 들어 1년에 8000만 달러(약 850억 원)의 지원금을 끊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전체 예산에서 미국의 분담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4분의 1가량이다.

유네스코는 내년에도 필요한 예산에서 1억4600만 달러나 부족하다. 2000여 명에 이르던 본부 직원은 현재 1700명가량으로 줄었다. 추가로 285명을 감축하기 위해 현재 명예퇴직 신청을 받고 있다. 세계유산협약 등에 필요한 당사국 총회도 비용이 없어 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결국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번 총회에서 투표권을 상실했다. 2년 넘도록 분담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지원하던 홀로코스트 교육을 비롯해 이라크 물 시설 건설, 쓰나미 예방시스템 연구, 아프리카 비폭력 교육 프로그램 등은 중단됐다.

‘스마트 파워’를 내건 미국이 교육 문화 과학 커뮤니케이션을 총괄하는 국제기구에서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하자 자국 내에서도 개탄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팔레스타인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게 하려는 법안이 거꾸로 미국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슈퍼파워 미국이 빠진 공백을 차지하려는 각축전도 분주하다. 가장 발 빠르게 나선 것은 주요 2개국(G2)인 중국이다. 이번 총회에서 중국의 교육부 차관이 사상 처음으로 유네스코 총회 의장(임기 2년)으로 선출됐다. 중국은 정규 분담금뿐 아니라 아프리카 교사교육 사업을 비롯한 각종 특별신탁 지원금에 수천만 달러를 내놓았다. 러시아 브라질 인도 등 브릭스 국가들도 각종 회의 유치와 특별지원금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내년은 1954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설립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유네스코의 재정위기는 한국에도 국가 위상을 높일 기회다. 저개발국가들 사이에서 한국의 원조는 다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단순히 돈이 아니라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 때문이다. 피폐한 전쟁터에서 책을 읽으며 일어섰던 경험과 노하우는 아무나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전승훈 파리 특파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