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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문병기]스위스 1대 12 법안과 반기업 정서

입력 | 2013-11-19 03:00:00


문병기 경제부 기자

스위스에서는 24일 고액 연봉 규제 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될 예정이다. ‘1 대 12 발의안’으로 불리는 이 법안은 최고경영자(CEO)와 임원 등이 받는 임금이 최저 임금을 받는 직원의 12배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분배를 중시하는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스위스에서도 이 법안에 대한 국민 여론은 그리 좋지 못하다. 이달 초 한 여론조사기관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 법안에 반대한다는 응답자가 55%로 반수를 넘었다. 이 법안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대기업들의 해외 이탈로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스위스가 이 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친다는 소식은 국내에서도 인터넷상에서 큰 화제가 됐다. 젊은 누리꾼들이 많이 모이는 몇몇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스위스에서 살고 싶다” “한국도 이런 법안이 필요하다”는 반응이 줄을 이었다. ‘도둑놈’ 등 격한 단어들을 동원해가며 수억 원의 연봉을 받는 국내 대기업 경영진의 ‘탐욕’을 비난하는 댓글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한국의 임원과 직원 간의 임금 격차는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임금 규제 법안이 제출된 스위스의 다국적 제약회사 로슈의 CEO는 지난해 최저 임금 직원의 261배에 이르는 1570만 스위스프랑(약 195억 원)의 연봉을 받았다. 대표적인 스위스 대기업인 네슬레, 노바티스, 크레디트스위스, UBS 등의 CEO들도 최저 임금 직원의 100∼200배에 이르는 높은 임금을 받는다.

미국은 임금 격차가 더욱 심하다. 미국 경제정책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상위 350개 대기업 CEO의 평균 연봉이 1407만 달러(약 149억 원)로 직원 평균 연봉 5만1200달러(약 5400만 원)의 270배가 넘었다.

반면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국내 10대 그룹의 등기임원 연봉은 평균 9억7800만 원으로 일반 직원 평균 연봉 6790만 원의 14.4배 수준이었다. 재계 1위인 삼성전자 역시 등기임원 연봉과 직원의 연봉 차이는 19.8배에 그친다.

상황이 이런데도 국내에서 스위스의 임금 규제 법안을 부러워하는 반응이 나오는 원인으로 기업들은 근거 없는 반기업·반부자 정서를 꼽는다. 하지만 기업들에도 이런 반기업·반부자 정서의 원인을 제공한 책임이 있다.

예를 들어 국내 대기업 오너 일가 상당수는 그룹 경영을 좌지우지하면서도 등기이사직을 맡지 않아 각종 경영책임에서는 벗어나 있다. 이들이 소득을 얼마나 올리는지도 물론 베일에 싸여 있다. 더욱이 정부가 내년 3월부터 연봉 5억 원이 넘는 등기이사의 보수 공개를 의무화하자 최근 일부 대기업 오너는 등기이사직을 사퇴하며 ‘그림자 경영’ 관행이 오히려 확산되는 형국이다.

물론 기업들은 오너들의 소득이 공개되면 반기업 정서가 더욱 확산될 것을 우려하는 듯하다. 하지만 자꾸만 실체를 감추려드는 비밀주의가 반기업 정서라는 ‘괴물’을 더 키우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기업들이 하루빨리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문병기 경제부 기자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