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정구호씨, 제일모직 전무 그만두고 국립무용단 ‘묵향’ 총연출 데뷔
대기업 임원이라는 타이틀을 벗고 자유로운 창작의 세계로 뛰어든 디자이너 정구호. 그는 “나이도 나이거니와 무대 작업을 하면서 순수 창작에 목말랐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뒤의 두 무용수는 정구호가 ‘묵향’ 공연을 위해 디자인한 한복을 입은 국립무용단 이석준(왼쪽)과 송지영.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디자이너 정구호(51)가 제일모직 전무 타이틀을 벗은 뒤 가장 먼저 손대는 작업은 국립무용단의 작품 ‘묵향(墨香)’ 총연출이다. 의상부터 음악, 무대 디자인까지 아우르는 작업이다. 그는 산조 수백 곡을 찾아 듣고 한복의 풍성한 치마 라인을 그리면서 순백색 화선지를 펼쳐놓은 듯한 무대를 구상하고 있다.
19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만난 그는 “(회사) 눈치 안 보고 시간을 마음껏 쓸 수 있어서 좋으면서도 낯설다”고 했다. “패션은 업보예요. 전생에 죄를 짓지 않고서야.(웃음) 6개월마다 컬렉션을 시험 보듯 내놓고 수많은 이들의 비평을 받아요. 길도, 정답도 없어서 끊임없이 스스로 찾아가야 해요. 불안하고 힘들지만 성취감도 엄청나죠. 공연예술 작업은 이와 비슷하지만 그래도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겨요. 7분간 펼쳐지는 단 한 번의 패션쇼가 아니라 수차례 공연하면서 수정, 발전시킬 수 있고 다양한 분야의 인력이 협업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성취감을 느낍니다.”
그는 “춤 동작과 음악, 의상이 모두 전통이지만 공연이 끝난 뒤에 관객들이 ‘아, 참 모던하다’고 느끼길 바란다”며 “현대적인 요소를 덧입히지 않아도 전통이 동시대와 호흡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정구호는 지난 10년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구호(KUHO)’ 디자인을 총괄하며 제일모직의 여성복 사업을 업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기업 임원으로 10개가 넘는 브랜드를 총괄하면서도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와 ‘황진이’, 국립발레단의 ‘포이즈’, 국립무용단의 ‘단(壇)’ 등 다양한 작업에 참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무용 작업은 회사라는 일상에서의 탈피이자 돌파구였어요. 무용계 분들이 화내실지 모르겠지만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가볍게 여겨서가 아니라 재미난 놀이 같으면서 즐거운 도전이었어요. 육체는 피곤했을지언정 정신은 하나도 피로하지 않았어요. 돈은 안 되지만.(웃음) 영원히 남을 일이기 때문에.”
정구호가 참여한 공연은 무용계에서 평가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무용을 잘 모르고 만드는 무대’라는 지적도 나왔다. 그도 알고 있다고 했다. “10대 때 미국에서부터 무용 공연을 꾸준히 봐서 제법 전문가인데…. 눈치는 안 봐요. 작품으로 실제 실력을 보여주면 돼요. 내 작업이 괜찮으면 일할 기회는 계속 생길 거니까요.”
“후회하는 게 없어요.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아직 결혼을 못했나? 아직은 일이 너무 좋으니까. 매일매일 새로운 상상을 해요.”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