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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규의 ‘직필직론’]통진당의 3보1배 퍼포먼스

입력 | 2013-11-21 03:00:00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정부가 헌법재판소에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를 하자 통합진보당은 3보 1배, 108배, 삭발 등의 퍼포먼스로 맞섰다. 통진당 소속 의원과 당원들은 집단으로 머리를 깎고 서울광장에서 헌법재판소까지 3보 1배를 했다. 이정희 대표 등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두꺼운 좌복을 깔고 ‘72시간 릴레이 108배 철야정진’을 벌였다. 삭발이야 운동선수나 연예인도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며 자주 하는 일이라 불교만의 의식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3보 1배나 108배는 정통 불교의식이다. 통진당은 정부의 법적 공격에 종교의식으로 대응한 셈이다.

대중감성 자극에는 매우 효과적

종교의식은 정치적 항의 수단으로 왕왕 사용된다. 종교의식 특유의 엄숙함과 신비함은 깊은 호소력으로 대중을 설득하고 결집하기에 적절하다. 종교의식이 보여주는 극적인 장면들은 언론을 끌어들여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효과가 크다. 대표적인 경우가 불교의 분신자살이다.

불교에서 분신자살은 희생의 궁극적 형태로 간주된다. 나를 희생해서 세상의 고통을 끝내고 평화를 이루려는 영혼의 호소라는 것이다. 그러나 분신자살은 불교를 탄압하는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승려들의 가장 극적인 순교방법에 그치지 않고 국민의 정치투쟁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1960년대 베트남에서 발생한 승려들의 분신자살은 전쟁과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을 촉발시켰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종교 박해에 항의한 승려 틱꽝둑의 분신은 사이공의 정치 환경을 바꿨다. 분신자살 이후 마치 허리케인이 강타한 것처럼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고 한다. 티베트의 승려들도 중국의 지배에 대한 저항의 방법으로 분신자살을 선택했다. 2009년 이후 승려 100여 명이 자신들의 몸을 불살랐다. 승려들의 잇단 희생은 티베트 사람들의 끈질긴 독립투쟁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한 극단의 종교의식이 갖는 정치적 힘은 승려뿐만 아니라 정치적 항의 수단을 찾는 비종교인들을 자극했다. 불교는 물론이고 역사와 동서양을 초월해 분신자살은 저항의 최고 상징이 되었다. 우리나라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도 그 경우이다.

그러나 최근 파키스탄의 13세 소년이 새 교복을 살 수 없는 형편을 비관해 분신으로 목숨을 끊고, 인도의 임업학과 대학생들이 만약 삼림 당국이 충원 정책을 개혁하지 않으면 집단 분신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개인적 명분을 위해 이용되자 분신자살에 대한 회의와 우려가 적지 않다. 불교 경전은 그런 행동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종교적 논쟁 이외에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종교의식을 빙자한 광기에 희생되고 있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극단적 종교의식이, 성직자도 아닌 사람들의 개인적 목적을 위해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식에서 비롯된 분실자살은 이유야 어떻든 오랫동안 정치적 항의의 방법이 되었다. 하지만 108배나 3보 1배는 여전히 순수한 종교의식이다. 108배는 참회를 위한 것. 중생의 번뇌 수가 108개라는 데서 비롯됐다. 성철 스님은 태어나기 이전의 세상에서 지은 죄로 인해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업장·業障)를 없애기 위해서는 백팔참회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업장이 소멸되어야 지혜의 눈이 열려 수행이 제대로 된다고 하였다.

업 뉘우치고 모든 생명 돕겠다는 맹세

3보 1배에는 여러 뜻이 들어 있다. 1보에 부처님께 귀의하고, 2보에 법(가르침·진리)에 귀의하고, 3보에 스님들께 귀의한다. 또 1보에 이기심과 탐욕을 멸하고, 2보에 속세에 더럽혀진 진심(塵心)을 멸하고, 3보에 치심(恥心)을 멸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하면서 자신이 지은 모든 나쁜 업을 뉘우치고, 깨달음을 얻어 모든 생명을 돕겠다는 서원을 하는 수행법이다.

2003년 새만금 간척지 사업으로 인한 환경 훼손 등을 막기 위해 불교 천주교 원불교 등 종교계가 합동으로 3보 1배 수행을 진행했으나 그것은 성직자들의 항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스님들도 아닌 정치인들이 108배나 3보 1배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들이 개인의 종교 활동으로, 진정한 참회를 위해 그러한 의식을 하는 것을 누가 뭐라 하겠는가.

정치적 목적 위한 종교의식은 기만

불교에서는 그러한 행위가 본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모두가 헛깨달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하물며 일종의 정치적 퍼포먼스로 108배나 3보 1배를 하는 데 이르러서는 종교의 가치를 훼손하고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통합진보당이 과연 불교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108배나 3보 1배 모두 특정 정당의 이념이나 조직의 생사를 지키기 위한 의식이 아니다. 자신의 정당을 지킨다며 불교의 수행법을 동원하는 것은 생뚱맞아 보인다.

정치는 종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선거철이면 정치인들은 온갖 종교 행사에 참석하고 유력 종교인들을 찾아 다녀야 한다. 종교가 정치여론을 형성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법의 심판을 앞두고 법리 논쟁보다 종교의식을 벌이는 것은 지나치다. 정치가 종교에 덜 끼어드는 것이 필요하다. 정치가 종교를 덜 이용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