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 부산외국어대 교수 ‘개항기 조선의 아편 확산’ 논문
일제강점기 조선의 농촌에서 조선인이 양귀비의 유액을 채취하고 있다. 일본은 조선을 아편 생산지로 이용했고 그 아편을 외국에 팔아 돈을 벌었다. 사진 출처 조선총독부 전매국 편 ‘조선전매’(1941년)
1901년 8월 12일 황성신문에 실린 논설의 일부다. 당시 한성에서 하루에 팔리는 아편의 양이 3만 명분에 달할 정도로 조선에 아편이 만연했다는 것이다. 박강 부산외국어대 역사관광학과 교수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에 실은 논문 ‘개항기(1876∼1910) 조선의 아편 소비와 확산’에서 밝힌 내용이다.
논문에 따르면 조선 정부는 아편전쟁(1840∼1842)을 전후해 중국 아편 문제의 심각성을 접했고 1876년 개항 이후에도 조선에 아편이 유입되는 것을 경계했다. 조선은 각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아편 수입을 금지하는 조항을 넣었다. 그럼에도 1882년 조선과 청나라 간에 무역이 본격화되고 많은 청 상인이 조선에 머무르자 아편 유입을 막을 수 없게 됐다.
조선인들이 아편을 흡연한 동기는 중국 대만에서와 마찬가지로 대개 질병 치료가 목적이었다. 쾌락을 위해 아편에 손을 대는 이도 점점 늘었다. 청나라의 문화를 모방하려는 심리도 아편 확산을 부추겼다. 1898년 7월 30일 독립신문은 “지금은 아편연같이 독한 물건을 경향 간에(서울과 지방을 아울러) 먹는 사람이 많다하니 청국에 폐단 되는 것을 보면서도 이 버릇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항상 남의 속국 노릇 하던 비루한 기상으로 청국 사람이 하는 일은 좋은 줄만 알고 배우는 모양이니 가련한 인생들이로다”라고 썼다. 아편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하기 위한 음독약으로 쓰이기도 했다. 1907년 일본이 고종을 퇴위시키자 이에 항거해 이규응 역시 아편을 먹고 자결했다.
일본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양귀비를 재배해 아편 생산지로 이용하기에 이른다. 일본은 1914∼1944년 조선에서 저비용으로 아편을 생산하고 대만, 관동주, 만주국에 수출해 돈을 벌었던 것이다. 박 교수는 “일본은 조선에서 재배한 아편을 팔아 돈을 벌었지만 조선인들의 아편 흡연이 노동생산성 저하, 범죄 증가로 이어져 식민 통치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고 아편을 엄격히 단속하면서 점차 아편 흡연이 사그라졌다”고 말했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