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원 정치부장
법대로 처리해야 할 일을 정치적으로 떼를 쓰면 들어주던 관행은 원칙과 글로벌 스탠더드를 중시하는 박근혜 정부에선 통하지 않는다는 청와대의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정국을 마비시키고 있는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 사건의 해법으로 ‘국회 중심 정치’라는 화두를 던졌다.
박 대통령은 “정치는 국회가, 국회의원들이 하는 것”이라면서 “최근 야당이 제기하고 있는 여러 문제를 포함해 국회에서 여야가 충분히 논의해 합의점을 찾는다면 존중하고 받아들일 것”이라고 했다. 국가정보원 사건 특위든 특검이든 기본적으로 국회가 의논해서 정할 사안이며, 여당과 야당이 논의하는 것이지, 청와대가 지침을 줄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박 대통령이 국회 연설에서 “제1당인 새누리당이 전권을 갖고 지혜로운 해법을 찾아내줄 것으로 믿는다”고 덧붙였다면 어땠을까? 실질적인 권한을 여당에 위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야당 의원들이 “대통령이 국회에 공을 떠넘기는 식의 ‘유체이탈 화법’을 쓰고 있다”면서 서울광장으로, 광화문광장으로, 청와대 방향으로 몰려가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민주당 중진들이 실권 없는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보다는 대통령의 의중을 업고 원내에 복귀한 것으로 알려진 서청원 고문과의 만남에 더 기대를 거는 듯한 모습은 현재의 어정쩡한 여당 구조상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이럴 바엔 차라리 대통령이 직접 국회 연설 이후 새누리당 지도부를 불러 ‘반드시 해법을 마련하라’는 지침을 줬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얘기도 정치권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새누리당의 당헌 8조(당과 대통령의 관계)는 ‘대통령에 당선된 당원은 당의 정강 정책을 충실히 국정에 반영하고, 당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적극 뒷받침하며 그 결과에 대해 대통령과 함께 국민에게 책임을 진다’고 돼 있다.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가 먼저 머리를 맞대고 꽉 막힌 정국 타개책을 논의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범친노(친노무현) 세력이 다수인 민주당에서 입지가 넓지 않은 김한길 대표에게 여야 협상에 나올 명분을 주기 위해 야당이 주장하는 특검 수용이 어렵다면 특임검사든, 국정원 댓글사건과 별개의 추가 혐의에 대한 ‘별건 특검’이든 검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성원 정치부장 sw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