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원 출신 첫 소년보호위원 장영철씨
23년 전 청주소년원에서 소년범과 교사로 만난 장영철 씨(오른쪽)와 최양재 교사. 최 교사를 통해 인생을 바꿨다고 믿는 장 씨는 이렇게 말했다. “소년원에 갔던 걸 후회하거나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가지 않았다면, 거기서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전 지금처럼 살고 있지 못할 겁니다.” 청주=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지난달 22일 청주대안교육센터. 학교 폭력으로 법원으로부터 보호관찰처분을 받고 온 소년에게 장영철 씨(39)가 말했다. 약 3년간 소년보호위원으로 활동했지만 쑥스러움을 타는 성격 탓에 많은 말을 하진 못했다. 하지만 소년은 귀를 기울였다. 장 씨가 23년 전 자신처럼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서다. 당시 이곳은 청주소년원이었다.
소년원에 들어가다
하루하루가 재미있었다. 다른 조직과 패싸움도 많이 했다. 학교는 잘 가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나갔을까. 선생님 앞에서 귀에 담배를 꽂고 다닐 정도였다. 그러나 장 씨는 나름의 원칙을 지켰다. 공부를 잘하거나 약한 아이들은 절대 괴롭히지 않았다.
즐거운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중학교 3학년이던 1989년 12월, 친구와 선후배 7명이 한 번에 붙잡혔다. 장 씨는 단속을 피해 도망갔다. 하지만 그는 사흘 뒤 제 발로 경찰서에 갔다. 붙잡힌 친구, 선후배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만큼 장 씨에게 ‘그 생활’은 자랑스러웠다. 장 씨는 구속 기소됐다. 폭력조직 가입 및 활동, 폭행 등의 혐의(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였다.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은 장 씨는 소년원 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 5월이었다. 처음에는 ‘여길 나가도 예전 생활을 계속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다짐을 고쳐먹게 만든 건 함께 소년원에 들어온 선배였다. 선배는 힘없는 아이들을 괴롭혀 빵을 뺏어 먹었다. 예배를 보고나면 하나씩 주는 빵이었다. 밥 말고는 먹을 게 없는 소년원에서 정말 소중한 간식이었다. 밖에서 최고로 멋있었던 그 선배가 아니었다. 장 씨는 생각했다. ‘양아치보다 더 못하게 살면 안 되겠다. 질 낮게 살지 말자.’
저승사자를 만나다
최양재 교사(48)가 본 장 씨의 첫인상은 그랬다. 1989년부터 청주소년원에서 보호직 공무원으로 일한 최 교사 눈에 장 씨는 그저 ‘조폭(조직폭력배)’이었다. 당시 소년원에는 조폭이 25명 정도 있었다. 소년원 내에서도 서로 세력 다툼하고 난동 피우는 일이 허다했다. 매일이 전쟁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유리창이 깨지지 않으면 의아할 정도였다.
최 교사는 아이들에게 ‘저승사자’로 통했다. 최 교사는 아주 엄했다. 기가 세고 제멋대로인 아이들을 잡으려면 도리가 없었다. 최 교사는 아이들에게 “머리에서 똥 빼라! 머리에 똥이 가득가득하다!”고 소리쳤다. 장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 교사에게 장 씨는 조금 독특한 아이였다. 나서거나 튀는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까워진 건 아니었다.
최 교사와 장 씨 사이에 변화가 생긴 건 1990년 5월 말 열린 ‘전국 소년원 체육대회’ 때부터였다. 청주소년원은 처음으로 3등상을 수상했다. 장 씨의 역할이 컸다. 씨름에 출전한 장 씨는 100kg 되는 거구를 냅다 눕혔다.
새 인생을 꿈꾸다
장 씨는 공부부터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밤 12시나 새벽 2시까지 독서실에 남았다. 너무 오랫동안 쉰 공부였다. 영어와 수학은 어려웠다. 대신 국어와 국사 같은 한글만 알면 할 수 있는 과목에 시간을 투자했다. 외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장 씨는 1991년 4월, 한번에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장 씨를 1년간 지켜본 최 교사는 말했다. “영철아, 넌 꼭 잘 살 거다!” 최 교사는 확신했다. ‘영철이는 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않을 아이다.’ 최 교사의 눈은 정확했다. 수많은 소년범들을 보면서 키운 안목이랄까. 몇 개월 안에 다시 소년원에 들어온다는 것까지 맞힌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장 씨는 달랐다. 스스로 변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최 교사는 장 씨 몰래 장 씨와 함께 들어온 폭력조직 선후배들을 불렀다. 장 씨가 “더이상 조직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꽤 괴롭힌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영철이 가만히 둬라.” 최 교사는 짧게 말했다.
조용한 성격 탓에 장 씨는 최 교사가 칭찬을 해줘도 별 반응을 보이는 법이 없었다. “선생님, 저는 한 번 한다면 합니다.” 최 교사 기억에는 이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장 씨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했다. 출소 이후의 새 인생을. ‘2, 3년간은 친구고 뭐고 절대 안 만난다. 밤 9시 이후로는 집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는다.’ 술 먹고 자제력을 잃어 혹시라도 주먹을 휘두를까봐 우려해서였다.
장 씨는 2년을 꽉 채우고 소년원을 나갈 수 있었다. 만기를 4개월 앞둔 시점에 형기가 6개월 연장됐기 때문이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폭력조직에 이름을 올렸던 사람의 형기를 늘렸다. 밖에 있었다면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1992년, 장 씨는 미평중고교를 졸업했다. 그가 안에 있는 사이 청주소년원에서 미평중고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가구점 대표가 되다
장 씨는 아버지 지인이 운영하는 가구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운명이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그저 하루 동안만 가게의 물건 진열을 도와주러 간 거였다. 하지만 가구가 그렇게 반짝일 수가 없었다.
그날부터 장 씨는 13년을 일했다. 직원 10명 중 매일 1등으로 출근하고 꼴찌로 퇴근했다. 2년 동안 배송 업무만 했는데, 주말에는 가구점에서 구석구석을 청소하면서 점원을 쫓아다녔다. 점원이 손님에게 어떻게 말하는지를 듣고, 가구별 특성을 외웠다. 그 모습을 본 사장은 장 씨에게 판매 보조 업무를 맡겼다. 장 씨는 가구를 곧잘 팔았다. 결국 그는 26세에 총책임자 지휘를 맡았다. “다른 누구보다 너는 내가 믿는다.” 사장은 말했다. 장 씨는 아버지뻘 직원 10명을 데리고 일했다.
장 씨는 가구점 경리로 일하던 사장의 조카와 7년간 연애했다. 소년원에 다녀온 걸 숨긴 적은 없지만, 아이는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장 씨에게 아내는 정말 예뻐 보였다. 올바른 부모 밑에서 자란 데다 요즘 사람 같지 않게 씀씀이가 헤프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음이 넓었다. 그녀는 “지금이 중요하지 과거가 무슨 상관이냐”고 말했다. 그런 그녀 앞에서 장 씨는 당당한 ‘오빠’가 될 수 있었다. 장 씨는 74년생, 아내는 빠른 74년생인데 장 씨는 처음에 한 살을 속였다. 거짓말은 금방 탄로 났지만 별 수 있나. “한번 오빠는 영원한 오빠”인 걸.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두려웠다. 스스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게 딸이 있다면 절대 나 같은 놈에게 결혼을 허락하지 않을 거다.’ 5년간 비밀 연애를 했다. 장 씨는 그녀의 집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예비 장인은 “2년 정도 지켜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해 휴가부터 예비 장인은 장 씨를 불렀다. 예비 장인은 동생(가구점 사장)을 통해 장 씨의 성실함을 익히 들어 왔다. 사람이 그렇게 오랜 시간 거짓으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결혼 전 장 씨는 최 교사에게 아내를 데리고 갔다. 최 교사는 단번에 말했다. “이 녀석 진짜 믿을 만한 놈이에요. 괜찮은 놈이에요.” 장 씨는 2001년 5월 결혼식을 올렸다. 현재는 세 아이의 아빠다.
결혼 후 일은 더 잘 풀렸다. 장 씨는 2004년 독립해 도매를 하다가 2006년 가구점을 차렸다. 현재는 충북 청원가구마을에서 가구점 2곳을 운영하고 있다. 중국에서 가구를 수입해 도매도 하고 있다.
‘나’ 같은 아이들을 돕다
3년 전부터 청주대안교육센터의 소년보호위원으로 활동하는 장영철 씨가 학교폭력을 저질러 보호관찰처분을 받고 온 소년을 만나고 있다. 청주=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장 씨는 최 교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도 아이들에게 조그만 용기라도 주고 싶었다. 소년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 씨에게 소년원은 인생의 어두운 부분이 아니다. 인생을 바꾼 곳이다. 최 교사는 장 씨에 대한 추천서를 썼고, 법무부는 범죄경력조회 및 심사를 거쳐 장 씨를 소년보호위원으로 임명했다. 소년원 출소자가 소년보호위원이 된 건 최초였다.
장 씨는 소년범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많이 했다. 상담실에 새 가구를 놓아줬고, 아내가 하는 빵집에서 틈틈이 간식을 가져다준다. 현재는 여자들만 있어 미평여자학교로 바뀐 소년원 수감생들은 선배가 보내준 빵을 맛있게 먹는다. 장 씨가 그랬듯 그 안에서 여전히 빵은 최고의 간식이다. 말이 별로 없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 탓에 여러 명을 대상으로 한 강연은 아직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앞으로 소년범 몇 명을 정해 멘토 역할을 할 생각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지금이 인생의 끝은 아니다”라고.
▼ 장영철씨의 ‘소년원 은사’… 24년간 소년범 돌본 최양재 교사 ▼
“문제아보다도 교육 시급한 건 문제부모… 아이들 이해못하겠다 말고 그냥 인정을”
최양재 교사에게는 장영철 씨 말고도 찾아오는 소년원 제자가 많다. 24년 동안 일하면서 만난 아이들만 수천 명. 제자들 중에는 새 삶을 찾은 아이들도 있고, 여전히 ‘조직’ 활동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 제일 나이가 많은 제자는 어느덧 40대. 하지만 어떤 제자도 최 교사 앞에서는 아이가 된다.
출소하면 다시는 소년원 근처에 얼씬도 하기 싫을 텐데 최 교사를 찾아오는 이유는 뭘까. 최 교사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소년원에 들어오고서야 처음 정을 받아 그렇다”고 말했다. 교사들은 소년원에서 아이들에게 선생님이자 부모가 된다. 수업도 하고 24시간 함께하기 때문이다. 1990년 공식적으로 소년원은 ‘학교’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소년원에서 수업을 듣고 이전 학교의 졸업장을 받을 수도 있다. 내부 분위기는 기숙사 학교 같아졌다. 최 교사는 주로 생활지도부장, 대학수학능력시험반 담임 등을 맡았다. 그는 “24년 중 18년은 집에 못 가고 소년원에서 아이들과 살았다”고 했다. 이런 점을 인정받아 지난해 12월 법무부가 주는 제6회 ‘올해의 교사상’ 대상을 받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들의 범죄 유형은 달라졌다. 가장 많은 건 절도지만 대상이 변했다. 자전거에서 오토바이, 자동차로. 가출 뒤 현금을 훔치거나 학교폭력을 저질러서 들어오는 건 여전하다.
문제아에겐 공통점이 있다. 부모에게 원인이 있다는 것. 최 교사는 “소년원에 들어오는 아이들은 대부분 가정에 문제가 있다. 아이들에겐 잘못이 없다. 처음부터 비뚤어진 아이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IMF를 겪으며 가정 해체를 경험했던 아이들, 조손가정 아이들이 기성세대에 편입되기 시작하면 범죄가 더 많아질 것”이라고도 했다.
최 교사는 최근 부모 교육에 신경 쓰고 있다. 부모가 바뀌지 않으면 아이들은 절대 바뀔 수 없기 때문이다. 법원에서 보호자에게 특별교육 명령을 내리는 경우도 많아졌다. 소년법도 2007년 12월 ‘소년부 판사는 가정 상황 등을 고려하여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보호자에게 특별교육 받을 것을 명할 수 있다’는 조항이 신설됐다. 최 교사는 부모들에게 △자녀와 대화하는 법 △자녀의 심리적 특성 이해하기 등을 가르친다. 1박 2일로 열리는 ‘가족솔루션 캠프’ 뒤에는 얼싸안고 눈물 흘리는 부모와 아이들을 볼 수 있다.
최 교사는 부모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인정하세요. ‘넌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다’고 하면 소통이 단절되고, 아이는 집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또래들과 어울리며 범죄를 저지르게 되죠.”
청주=최예나 기자 ye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