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 키워봐” 했던 MB, 2년 뒤엔 “유능한데 대중성이…”
2012년 12월 7일 청와대에서 열린 전국 시도지사 간담회. 이명박 대통령이 김문수 경기지사(왼쪽)를 만나 반갑게 악수하고 있다. 넉 달 전 대선후보 경선에 도전한 김문수는 경선 2등을 차지했지만 전국구 정치인으로서 한계를 보여줬다. 김문수는 다시 2017년 대선을 바라보고 있다. 동아일보DB
대선을 2년 6개월 앞둔 2010년 6월 어느 날 이명박(MB) 대통령은 김문수 경기지사의 최측근인 차명진 한나라당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입각설이 나돌던 차명진에게 “네가 할 일은 따로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차명진은 무턱대고 수도권 뉴타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문수가 민선 4기(2006∼2010년) 재임 시절 뉴타운 지구를 지정했지만 부동산 경기 침체로 일부 사업이 취소되자 2년여 뒤 대선 국면에서 여론이 부정적으로 흐를 것을 염려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MB도 일단 “알았다”고 말한 뒤 재차 “김문수를 키우는 것이 네가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문수는 그해 6·2지방선거에서 연임에 성공하며 여권 대선주자 반열에 오른 상태였다.
차명진의 기억. “지사님을 위해 MB 캠프에 갔던 거였다. ‘MB가 (2012년 대선 때 지사님을) 도와주겠지’라고 생각을 했던 거다.”
하지만 차명진의 착각이었을까. 정권 초기 당 대변인을 지내는 등 MB 정부에 충성을 다했지만 돌아온 대가는 신통치 않았다. “박근혜 전 대표의 지지율이 워낙 압도적으로 높으니 대통령이 어떻게 손을 댈 생각을 하지 못하더라. 나중에 알았는데 SD(MB 친형인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차기 주자로) 생각하고 있었더라.”
2012년 5월 8일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의 대선 출마 선언은 충격이었다. 임태희는 MB 정부의 대통령실장으로 권력 핵심에 있었고 여당의 정책위의장과 고용노동부 장관을 지낸, MB 정부의 산증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불과 보름 전인 그해 4월 22일 여야를 통틀어 가장 먼저 대선 출마를 선언한 김문수로서는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셈이었다.
김문수=“이게 뭐야, 대통령의 뜻이 없이 나올 수 있는 거야?”
김문수=“너무하잖아!”
김문수는 불쾌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MB가 자신의 대선 가도에 태클을 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캠프는 임태희 출마로 비박(비박근혜) 성향의 표가 분산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당시 새누리당 내에선 박근혜의 대선후보 선출은 떼어 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라는 분위기였다. 임태희 출마는 승패를 가를 만한 변수가 되지 못했다. 임태희의 설명. “정말 대통령께 상의를 드리지 않고 나갔다. 경선이 파행으로 가선 안 되고, (경쟁을 통한) 뜨거운 경선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뜨거운 경선은 안 됐지만….”
김문수의 대학 은사이자 멘토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해 초 출마를 고심하던 김문수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대세는 박 전 대표다. 당선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나가지 마라. 대신 복지 분배 일변도 추세에 대해 네가 할 말이 있으면 이 기회를 통해서 국민에게 소신 발언을 해라.”
다른 하나는 박근혜와 대선경쟁을 벌임으로써 자신이 국가지도자로서 미래를 모색하는 사람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정치적 판단이었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박근혜의 지지도가 워낙 견고해 좀처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래서 찾아낸 대안이 ‘비박 연대’였다. 연결고리는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재오, 정몽준 의원과 함께 당내 ‘경선 룰’을 완전국민경선(오픈프라이머리)으로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문수는 내심 비박 연대가 효용성을 발휘할 수 있을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김문수=“비박 연대가 되겠어?”
차명진=“안 됩니다.”
김문수=“….”
차명진=“하지만 그냥 놔두십시오. 그 자체가 만들어내는 여론의 관심이 있습니다. 다만 절대 ‘비박 연대’라는 용어를 쓰면 안 됩니다.”
차명진의 설명. “비박 연대를 놔둔 것은 경선에서 박 전 대표의 독주를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박 연대 자체가 국민에게 남길 메시지는 없었다. 지사님도 생각이 같았다.”
실제 김문수는 그해 6월 30일부터 공식 일정을 취소한 채 경선 참여 여부를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 당초 ‘경선 룰이 바뀌지 않으면 경선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약속대로라면 비박 연대의 두 축인 이재오, 정몽준과 함께 그해 7월 9일 경선 불참을 선언하는 것이 맞았지만 그는 장고했다.
그러곤 그달 12일 “새누리당의 승리를 위해 제 몸을 바치는 것이 바로 대도(大道)”라고 강조하며 경선 레이스의 막차를 탔다. 하지만 경선 불참 약속을 뒤집은 데다 할지 말지 결정이 늦어진 탓에 이미 실기했다는 비판론이 제기됐다.
전에도 김문수는 자신의 발언을 뒤집은 전력이 있다. 그해 4월 22일 출마 당시 지사직 사퇴를 얘기했지만 하루 만에 “도민들이 ‘당장 (대선후보가) 되지도 않는데 (중도에 사퇴한)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다를 게 뭐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태도를 번복해 버린 것이다.
김문수의 경선 참여 결정은 차명진의 설득에 따른 것이었다. 차명진은 그해 7월 11일 ‘세대교체’를 키워드로 출마한 김태호 의원이 마음에 걸렸다. 1961년생인 김태호는 비록 낙마했지만 2010년 8·8개각 때 국무총리에 내정됐고, 경남 김해을에서 2011년 보궐선거와 이듬해 4월 총선에서 연거푸 승리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한마디로 차세대 리더로 부상할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차명진은 대선 경선에서 김태호가 2등을 차지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2017년 차기 대선 주자가 김문수가 아닌 김태호로 비치는 정치적 상황을 사전에 차단해야 했던 것이다. 김문수는 그해 8월 20일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전당대회에서 김태호(3등)를 제치고 2등을 했다. 하지만 최종 득표율 8.7%에 불과했다. ‘경기도 최초 재선 도지사’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은, 박근혜의 84.0%에 비해 격차가 너무나 큰 2등이었다.
MB는 집권 5년 내내 김문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2010년 6·2지방선거 전에 핵심 참모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이런 얘기가 오갔다.
한 측근=“김 지사가 추진하는 GTX(수도권 광역급행철도)는 서민정책입니다.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MB=“맞아, 경기지사로서 그만한 경쟁력과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어.”
MB는 김문수의 인생 스토리도 높이 평가했다. 노동운동권 출신으로 2년 6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던 그가 1994년 신한국당(새누리당의 전신)에 입당해 15대부터 경기 부천 소사에서 내리 3선을 했고, 2006년 경기지사 당선에 이어 2010년 야권연대를 꺾고 재선에 성공한 점을 긍정적으로 본 것이다.
MB 정부 마지막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인 이달곤 전 수석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대통령은 김 지사를 기본적으로 좋아했다. ‘GTX는 한번 충분히 심도 있게 검토해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 김 지사는 스토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다.”
다만 MB는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바로 ‘대중성’이었다. 한 핵심 참모의 기억. “대통령은 경기지사로서는 김 지사만큼 경쟁력 있는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말로 ‘능력에 비해서 대중성이 왜 떨어지는지 모르겠어’라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찍으면 지난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넘게 지난 2013년 11월, 김문수는 ‘대중성 부족’이라는 한계를 좀처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MB의 기대와 예상대로 차기 대선을 바라보고 있지만 MB의 우려처럼 지지율은 좀처럼 오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고성호 기자 sungho@donga.com